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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절필동 Jan 24. 2024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씻기와 닦기

푸른 새벽에 새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은 한밤의 정적이 있어서입니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은 마음의 고요를 찾는 일이 선행되어야 할 것을 깨우는 소리입니다.

마음의 요동을 가라앉히는 일은 세월의 무게를 쌓아온 고전(古典)으로 눌러 놓는 일뿐입니다.


니체는 “바스락거리는 도마뱀의 몸짓”에서 “숨결 하나, 휙 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나의 작고 작은 소리 하나의 움직임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이 “최상의 행복을 만든다”라고 했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움직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살아야만 하는 부지런한 삶의 의지입니다.


니체의 말로는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입니다. 이것이 “창조”이며 “놀이”라고 말합니다.


주어진 삶이 아니라 만드는 삶입니다.

억지의 힘겨움이 아니라, 즐기는 '놀이'의 경지까지 들어올려야 하는 "힘에의 의지"입니다.


'삶의 의지'는 단순히 삶이 의지가 있는 게 아닙니다.

'삶에의 의지'입니다.

삶을 살아내려는 "힘에의 의지", 곧 힘을 내기 위한 의지입니다.

그래서 쭈어 마흐트(zur Macht)입니다.


나의 움직임이 멈춘 때와 곳에서 비로소 없던 움직임을 포착하고 바스락 소리를 들을 수 있나 봅니다.

그것이 꺼렸던 새까만 벌레일 때가 더 그렇습니다.


감옥이 배경인 장면들에 흔히 등장합니다.

그것도 음침하고 습한 독방에서 굶주림을 채우는 모습이기 쉽습니다.

일상이 무너지고 마지막 남은 삶의 의지를 깨우는 작고 작은 움직임을 보고 듣는 일입니다.


없던, 없어지던 것에서 있게 하는 것은 창조입니다.


니체는 “창조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고통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이며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창조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통과 많은 변신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고통을 돌아가지 않습니다.

고통을 지나쳐가는 우회 길은 가야 할 길의 방향을 영영 잃고 마는 시작점일지도 모릅니다.

고통의 가시밭길이라도 지나가야 지름길이라는 생각입니다.

‘고통의 처방이 아픔’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인(詩人)은 “신이 아픈 날 태어났다”라고도 합니다.

신을 간호하려 하기보다는 신의 부재에 대리자라는 느낌입니다.


당신을 만난 날부터 내가 줄곧 외우던 이상화의 「시인에게」는 지금도 잊지 않습니다.

지금은 인용(引用)보다는, 「당신에게」 내 마음으로 옮겨 쓰는 표절(剽竊)이고 싶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뭄 든 논에는 청개구리의 울음이 있어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오늘은 당신이,

“미친개 꼬리도 밟는 어린애의 짬 없는 그 마음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그렇습니다.


내일은 당신이,

“촛불로 날아들어 죽어도 아름다운 나비를 보”기를 바랍니다.


나와 당신이,

“언제든지 일식(日飾)된 해가 돋으면 뭣하며 진들 어떠랴” 노래하는 날이면 좋겠습니다.     



“한낱 빛 따위가 어둠의 깊이를 어찌 알랴.”


니체가 알려준 주문입니다.


한낮을 다 보내고 다리 펴며 누울 때 속으로만 웅얼거립니다.

니체의 주문은 내일의 낮을 당당하게 맞이하기 위한 준비처럼 어두울 밤의 초청에 기꺼이 응하게 합니다.


감옥에서는 한밤에 깨면 잠에 다시 빠져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잠에서 깨면 누워서 사방을 둘러보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기가 어디지’하는 잠시의 혼동이 종종 있습니다.


아직도 여기는 내 방이 아닌가 봅니다.


휙 하는 소리를 새벽에 들었습니다.

여름이라 종일 열어둔 창문을 뚫고 들어 온 새벽바람에 담요를 목까지 당겨 올렸습니다.

나의 삶의 의지가 초라해 보였습니다.


항소심 날을 기다리는 마음이 들떠 있는 가벼움도 가라앉은 무거움도 아닙니다.

무거울 확정의 날이 희망의 고문에서 벗어나는 가벼운 날일지도 모릅니다.



검사의 구형과 판사의 선고가 다 같지 않은 것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판사의 선고도 1심과 항소심과 대법원의 상고심이 달리 나올 때도 있습니다.

유죄가 무죄가 되기도 하고, 무죄가 유죄가 되기도 합니다.

유죄여도 형기가 저마다입니다.


법(法)의 무용(無用)을 말하는 게 아닌 것을 모르지 않을 것입니다.

법(法)이 하나라도 법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하나가 아니어서 그런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법을 해석하는 것은 사람만도 아닌 것을 압니다.


구형과 선고는 형벌의 기한을 정합니다.

월과 년수로 되어있습니다.

며칠이라고 형기(刑期)를 날수로 하는 경우를 보지 못했습니다.


지난해 말에 한 장으로 된 새해 달력이 방마다 들어왔습니다.

“젠장, 올해는 하루 더 살게 됐네.”

새 달력을 벽에 붙이던 방장이 내뱉은 말입니다.

2월이 29일로 되어있습니다.


밖에서는 하루를 더 살려고 온 힘을 다하는데,
안에서는 하루라도 덜 살고 싶어 합니다.


형기를 날수로 양형을 계산하지 않는 것은 법무부의 편이(便易) 때문이라는 생각이 짙습니다.

수인은 형기가 확정된 날부터 출소의 날을 셉니다.

년에서 월로 그리고 날로 세월을 셉니다.

형기는 벌의 기한을 정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벌에 기한을 둔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의 법조문이 있습니다.

오랜 역사는 ‘복수’의 정당성을 위해 애용했던 조문입니다.


법(法)이 정의(正義)라는 믿음과 권위를 갖는 것은 피해를 준 가해에 대한 정당한 보복의 판결에 기대는 것입니다.

법이 대리하는 보복과 복수에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가 긍정하는 판결을 보는 게 흔하지는 않습니다.

복수의 정당한 범위를 정하는 게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게 어려운 일입니다.


함무라비 법조문에 대해서 달리 보는 이도 있습니다.

‘복수’에 대한 허용이 아니라 제한을 두고 있는 조문이라고 합니다.


‘눈에는 눈으로만, 이에는 이로만’ 또는 ‘눈에는 눈만큼만,
이에는 이만큼만’이라는 해석입니다.


‘복수’의 허용에 범위와 한도를 두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판결이 ‘으로만’ 그리고 ‘만큼만’ 선고됐다고 수긍하는 수인들을 보는 게 흔치 않습니다.


형기(刑期)가 형(形)에 기한(期限)을 둔 것이라면, 형벌은 한도(限度)를 두고 있습니다.

선고의 형기(刑期)가 허용과 제한의 기울기에 어떤 추(錘)를 달(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수인(囚人)은 네모의 벽/담(口) 안에 가두어 놓은 갇힌 사람(囚)입니다.

네모(口) 안을 들여다보면 창살(井)이 있습니다.

감옥은 창살(井) 안에 칼(刀)로 가둔 형상입니다.

그것이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벌/형(刑)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죄마다 다르니 형(刑)마다 달라서 가두어 두는 그 기한도 다릅니다.

수인은 자신만의 형기(刑期)를 갖고 있습니다.


형기가 교화(敎化)의 기한이라면, 유죄의 죄를 ‘씻는’ 기한(期限) 일 겁니다.

그렇다고 형기가 다하면 죄가 씻겨 없어져 유죄가 무죄가 될 것을 기대하는 이는 없습니다.


수인(囚人)의 형기(刑期)는 자신의 없어지지 않을 죄를 ‘씻는’ 날들입니다.

형기(刑期)는 ‘없어지지 않는’ ‘씻기’를 치르는 수형(受刑)입니다.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형기가 교화를 채우는 날이라면, ‘씻기’를 달리해야 합니다.

  

‘씻기’는 ‘닦기’의 다른 이름입니다.

씻는 일은 닦는(修) 일입니다.

수인의 ‘씻기’는 ‘닦기’가 되어야 합니다.

‘씻어서’ 지우는 일이 아닙니다.

‘닦기’는 없애는 일이 아니라, 채우고 쌓는 일입니다. 수행(修行)입니다.


나의 형기(刑期)가 ‘씻기’라면,
나의 수행(修行)의 ‘닦기’는
무기(無期)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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