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힌 사람들에게 ‘출소’의 가장 큰 의미는 ‘독보’(獨步)입니다."
요즘 쌓여가고 있는 책들이 모두 ‘여행’ 이야기들입니다.
배낭족이나 패키지 관광객을 위한 여행안내서는 아닙니다.
『인도기행』, 『자전거 여행 1,2』, 『무진기행』,『유럽문학기행』, 『사찰기행』,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나를 찾아가는 길』…
읽고 또 읽는 책은 신영복 선생님의 여행기(?)입니다.
세계기행 『더불어 숲』과 국내 여행기인 『나무야, 나무야』입니다.
둘 모두 ‘당신’에게 엽서를 보내는 글들입니다.
편지가 아니라 엽서입니다.
엽서는 여행을 담은 짧은 손편지입니다.
명소마다 화려한 사진에 ‘다녀가다’는 자기 자랑을 부추기는 상술이 걸려있습니다.
선생님의 엽서는 포스트 카드 한 장에 다 담을 수 없는 길이를 갖고 있습니다.
사진은 없고 손수 그리신 그림들입니다.
그림만 보아도 글 모두가 들어 있습니다.
글과 그림 어느 것 하나 감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글씨(서체)는 이미 ‘처음처럼’ 소주 때문에 세상이 다 알고 있습니다.
엽서를 보내는 곳은 세계 그리고 국내 여러 곳이지만 아무 곳은 아닙니다.
나는 여행지의 순서를 주목합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에 대한 이유를 묻는 생각입니다.
세계에서는 스페인의 항구 도시 우엘바(Huelva)입니다.
콜럼버스가 떠났던 곳입니다.
그의 출항은 신대륙을 향한 식민주의의 시작이 되었던 것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국내에서는 밀양 얼음골입니다.
한여름 피서지를 떠올리기가 쉬운데,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제자 허준을 불렀던 곳입니다.
자신의 시신을 제자에게 해부하게 하였던 골짜기가 얼음골입니다.
청년의 날에 감옥에 들어가 중년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이제 “청년들아 나를 딛고 오르거라”라고 가장 먼저 말씀하고 싶으셨나 봅니다.
사형에서 무기로 그리고 특사로 풀려나기까지 20년 20일을 감옥에 계셨습니다.
수감(收監)의 세월만큼, 반세기 전의 감옥 생활을 상상하기란 어렵습니다.
지금,
나는 너무도 따뜻한 방에서 편하게 책을 읽고 편지를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갇힌 사람들에게 ‘출소’의 가장 큰 의미는 ‘독보’입니다. 혼자서 다닐 수 있는 권리를 그곳에서는 ‘독보권’이라 하였습니다. 가고 싶은 곳에 혼자서 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해방감이었습니다. 신영복, 『나무야, 나무야』 中
오래전에 읽었을 때는 ‘그런가 보다’ 했습니다.
다시 읽고 있는 지금은,
글자들이 책 속에 활자로만 박혀 있지 않습니다.
내가 보고 듣고 있는 그대로의 현실입니다.
맞습니다.
이곳에 들어선 후로, 내가 혼자 걸어본 적이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립니다.
접견을 나갈 때도 접견을 끝내고 뒤돌아 올 때도 혼자 나선 적이 없습니다.
온수 목욕을 갈 때, 채 마르지 않은 젖은 몸으로 돌아올 때 혼자 걷지 않았습니다.
알약 하나 받으러 갈 때도 그리고 빈손으로 돌아올 때도 나는 언제나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처음 들어온 곳의 길들을 몰라 누군가를 뒤따랐던 것은 아닙니다.
전방(轉房)을 갈 때도, 이감(移監)을 갈 때도 혼자 마음대로 정할 수도 갈 수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혼자 할 수 없는 것에 그리 힘들어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선생님의 ‘독보’(獨步) 단어를 보자 빨강 신호등에 급정거하듯 눈이 더는 글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순간 울컥했습니다.
‘하라는 대로 하는’ 사이에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몸이 떨렸습니다.
혼자 마음대로 걸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혼자 마음대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는 밖이라고 해서 ‘독보권’의 참 의미가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현대인의 건강을 위한 책들이 많을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기서도 그런 유의 책들이 다양한 제목들로 돌아다닙니다.
빅토르 위고, 괴테, 키에르케고르, 칸트, 니체, 헤겔... 유명인들의 건강 명언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책도 있습니다.
루소는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정신은 오직 나의 다리와 함께 움직인다”라고 했습니다.
사르트르는 “사람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라고 했다네요.
독일 하이델베르크 산책로에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라는 이름을 건 이유를 알 듯합니다. 그곳에서 바라보았던 네카강 건너 하이델베르크성이 기억납니다.
혼자서 어디든 언제든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밖이라고 해도 걷는 사람들이 드문가 봅니다.
밖에서도 걷지 못하는 도시민의 바쁜 생활의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있어 보입니다.
걸을 수 있는데 걷지 않는 것에 대한 철학자의 명언이 귀한 접대를 받나 봅니다.
나에겐 어려운 철학의 명제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의 말들은 쉬어 보입니다.
혼자 자유로이 걸을 수 없는 이곳에서는 오히려 생각을 달리하게 됩니다.
걸음을 멈추어야 생각을 깊이 할 수도 있습니다.
안에 있어 보면 오히려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책 제목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입니다.
선생님은 “참된 자유(自由)는 자기(自)의 이유(理由)를 갖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과 말과 행동들에 얼마나 많은 나의(自) 이유(由)가 있었을지를 성찰합니다.
이유는 결과보다 선행합니다.
나는(自)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이유(由)를 앞에 두지 못해서, 자유(自由)롭지 못한 갇힌 자가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갇혀서 다시 나의(自) 이유(由)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감옥에서의 나의 이유 찾기가 선행되어야, 출소 후 자유의 독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나의 여행, 독보는 그저 아무 데나 혼자 가는,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이유를 갖고 길을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했나 봅니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떠나야지, 다리가 떨릴 때 나서는 게 아니라고 하지요.
다음 어느 날, 이곳을 나서는 날에 나는 가슴보다 다리가 더 떨릴 것 같습니다.
그날까지 가슴만은 떨리는 날들을 살아가려고 합니다.
갇힌 자의 떠남은 다리만은 아닙니다.
감옥에서의 나의 독서와 ‘당신’에게 글쓰기는 나의 이유를 찾아가는 자유의 독보(獨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