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은유 <행방의 밤>
오늘은 새벽독서 7일 차, 일요일 새벽 거실에 있는 내 놀이터 (책상)을 옮기느라 날을 샜다.
그 여파로 몸이 찌뿌둥하다.
5시 20분에 눈은 부스스 떠졌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20분을 더 뭉그적거리다 일어났다.
이제 날은 새지 말아야지. 40대 후반.
이 번일의 깨달음 "너의 체력을 인정해라. 쉴 땐 쉬어라"
오늘의 독서처방은 읽어야 할 책,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시련의 의미, 살아야 할 이유,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와 은유 <해방의 밤-'하지 마'의 세계에서>이다.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시련의 의미> 부분을 읽어보자.
인간의 삶은 "적극적인 삶"과 "소극적인 삶"이 있다고 한다.
"적극적인 삶"은 인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고 "소극적인 삶"은 체험을 함으로써 충족감을 얻는다고 한다. (110면)
내가 보내는 하루는 창조하는 적극적인 삶인가?
아니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인가?
'창조'라는 것이 거창한 것 같지만 이렇게 새벽 독서를 하고 글 한 편을 쓰는 것도 창조에 속하는 거라 생각한다. 나는 출근 전 '창조'라는 적극적인 삶을 시작으로 하루를 뿌듯하게 시작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기다리는 부분이 드디어 나온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주 1)
우리는 왜 우리의 삶이 무지갯빛 희망과 성공으로 가득 차기를 바라는 걸까?
왜 그게 삶의 전부라고 생각해서 그렇지 못한 현재의 나를,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 고난, 역경, 시련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걸까?
작가는 말한다.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이야말로 깊이 있게 자기 삶을 들여다보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이다. 그런 기회를 흘려보낼 것인지 잡아채서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인지는 본인 스스로의 선택이라 말한다.
그저 시련이 다가온 것에 함몰되지 않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 그 의미를 깨달아 자신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 그것이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을 아는 것, 이 모든 것은 내가 시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나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수감자를 치료하면서 자기 삶의 어떤 목적, 목표, 의미도 없는 사람은 곧 파멸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중요한 메시가 나온다.
바로 '우리'와 '삶'에 대한 관점의 전환!
우리는 늘 어떤 삶을 기대한다.
좀 더 나은 경제력, 좀 더 건강한 신체, 좀 더 성공한 나.
그런데 그런 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우리는 '삶'이 무의미하게 여겨지고 무가치하게 여겨진다.
작가의 말처럼 그렇다면 "삶"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할까?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는 지혜와 용기, 성장하기 위해하는 꾸준한 노력, 스스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 삶.
이런 식으로 내 인식을 전환하면 나는 지금 현실의 시련과 잘 맞서가며 성장하려고 노력 중이기에 삶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합한 삶을 살고 있는 거 아닐까?
그렇다면 내 삶도 나도 꽤 괜찮은 거 아닐까?
작가는 릴케의 시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언급하며 '시련을 완수한다'라는 표현을 한다.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와 그 시련을 어떻게 완수할지 선택권이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극소수만이 깨닫고 있다 말한다.
또한, 우리가 힘든 시련 앞에서 나약해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전한다.
부종 때문에 고생하던 동료에게 어떻게 나았냐고 물었을 때, 그 동료 수감자의 고백이 내 마음을 움직인다.
"실컷 울어서 내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의미하기 때문이다." (126면)
왜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그 목적을 내 삶에서 잘 찾고 있나?
그 목적이 있다면 나는 그 어떤 시련이 와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었나?
과연 내 삶이 기대하는 나로 살아가기 위해 난 오늘 무엇을 했나?
깨달음과 고민을 동시에 안고 책을 덮는다.
읽고 싶은 책이자 읽어야 할 책 (3월 독서모임 도서) 은유 <해방의 밤>을 급하게 펼친다.
왜 여성들에게 은유 작가의 <해방의 밤>이 많이 읽히는지 알아가고 있다.
여성으로서, 글을 쓰는 작가로서 그녀는 우리 여성들이 처한 현실 속에서 우리가 해방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쓴 것 같다.
코로나 시절 글쓰기 줌수업에 젖먹이 아이를 데리고 참가한 한 학우의 이야기를 한다.
다른 분들에게 방해될까 노심초사하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는 그녀의 말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때는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다."라고.
그냥 '해야 한다'는 직감만 믿으라고.
이 말이 나한테도 적용될까?
하루 잠을 5시간 미만으로 줄이면서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써야 할까?
“그냥 해라“는 <엄마의 유산> 지담 작가의 말처럼, “해야 한다”는 <해방의 밤> 은유 작가의 말처럼, 오늘 아침 그 말들을 정신의 지팡이로 세워 나약해지려는 나를 부축 한다.
“먹지 마, 커지지 마, 멀리 가지 마, 많이 원하지 마” (53면) 이처럼 여성은 ‘하지 마 세계‘에 갇혀있다.
이 하지 마 감옥에 갇힌 여성은 자신이 뭔가를 원할 때 내가 이걸 해도 되나, 그럴 말 한 사람인가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고 한다.
나 또한 내가 글을 쓰는 작가가 될만한 사람인가? 자질이 있나? 이런 의심들을 품어오며 지난 몇 달을 보냈다.
브런치스토리 팝업 스토어에서 발견한 “쓰는 사람이 곧 작가다”라는 문장을 가슴에 품고 글 한편, 한편을 써 내려갔다.
“매일 뭐라도 쓰는 사람이 되자”라는 말은 내가 새벽독서를 하며 내 가슴과 정신에 새기는 말이다.
부족한 글이지만 부족하기에 성장할 수 있다.
부족하기에 나는 더 성장하고 싶다.
근무시간 9분 전인데 나는 아직 차 안에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5:40분부터 하루를 시작했는데 글 쓸 시간이 부족하다.그렇다면 나는 이 시련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저녁에 시간 날 때 글 쓰는 루틴으로 바꿀까?
글의 내용을 확 줄일까?
아니지…
나는 30분 더 일찍 일어나기로 마음먹는다.
새벽독서하고, 글 써서 발행하고, 뛰지 않고 차분한 마음으로 출근하기 위해서.
빅터 프랭클의 말처럼 시련을 어떻게 이겨낼지는 내 선택이고 내 몫이다.
그 선택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그 선택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자유니까.
나는 나의 선택권을 과감하게 쓰기로 한다.
주 1,2>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