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플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은유 <해방의 밤>
혹시 내 새벽독서글을 기다리신 분들이 계실까? 너무 늦은 거 아닐까 살짝 조바심이 난다.
보통 아침 출근 전 올리는데 첫 주가 되는 토요일이라 루틴이 조금 바뀌었다.
오늘은 4시쯤에 일어나서 새벽독서를 시작하고 싶었는데 5시쯤 눈이 떠졌다. 절반의 실패다. 아니 절반의 성공이다!
오늘은 새벽 6시에 <엄마의 유산 2> 글쓰기 회의가 있는 날이라 마음이 바쁘다.
5시부터 6시까지 다른 작가님 글 읽고 피드백 후, 짧은 독서를 했다.
8시 넘어서 회의가 끝나고 글을 어떤 식으로 추가하고 다듬어 깊게 파고들지 고민이 깊어진 채로 다시 책을 펼친다.
걱정은 멈춰! 일단 읽어!
나는 완독률이 낮은 사람.
오늘쯤 다른 책을 펼칠까 했지만 참았다.
멋진 말로는 이런 책 읽기를 병렬독서라고 하지만 나는 문어발독서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날마다 끌리는 책으로 손을 쭉 뻗어 몇 장 읽다 덮고 또 다른 책을 본다.
하지만 나는 읽어야 할 책이 있다.
제발!!! 완독을 하자!
어제에 이어 읽어야 할 책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읽고 싶은 책 은유 <해방의 밤>을 읽는다.
작가는 수용소에서 몇 차례 운명적으로 죽음을 피해 간다. 그러면서 “테헤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죽음의 신을 본 하인이 두려움에 떨며 주인에게 말을 빌려달라고 한다. 그는 밤새 달려 도망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갈 것이라고 말하며 죽음의 신을 피해 도망친다.
잠시 후 죽음의 신을 마주친 주인은 하인을 놀라게 한 죽음의 신에게 따진다. 하지만 죽음의 신은 말한다. 그저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되어있는 하인이 아직 이곳에 있어 당황해서 그랬다고.
하인은 자신이 죽을 운명을 피해 그곳으로 갔는데 사실 이 또한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정해진 운명이었다니.
운명이라는 이름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없는 걸까?
정말 모든 것들은 운명의 굴레 안에서 벌어지는 일일까?
그렇다면 나는 삶에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만약 운명이 내가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에 연연하지 말자.
그저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충실하게, 나만의 의미로 채워가며 살아가야겠다.
어느덧 오전 9시가 가까워진다.
은유 <해방의 밤> 첫 이야기를 펼친다.
어제는 목차를 훑어보다 버지니아 울프 이야기에 “울프의 파도”를 읽었었다.
이제는 처음부터 차근히 읽어봐야지.
작년에 은유 작가의 강연을 유튜브에서 듣다가 스치듯 들었는데 그때 내 인생도 이런 삶이지 싶어서 공감했다.
나 포함 아마 대부분의 주부들이 이런 삶을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살아가야 하겠지.
우리는 언제쯤 그 삶에서 벗어나 본연의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지금도 나는 시부모님 저녁을 차려야 하는 며느리 역할을 하러 시부모님 댁에 와서 이 글을 쓴다.
나도 누가 차려주는 밥 먹고 싶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날 위해, 내가 원하는 음식을 내가 원할 때, 만들어 먹으며 날 위해 살아보고 싶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새벽 5시부터 시작한 하루인데 줌 회의하고, 새벽독서하고, 5시간 그림 그리고 늦은 점심 미역국에 말아 한 그릇 먹고 나니 어느덧 해가 기운다.
전기장판에 달궈진 엉덩이도 뜨근하고 졸음도 몰려와서 꼼짝달싹하기가 싫다.
하지만 은유 작가의 말처럼 시부모님 눈치 보느라 마음이 힘든 것보다 몸이 힘든 편을 택한다.
자, 어서 글 발행하고 저녁밥 차리고 오늘 글쓰기 수업에 관한 <엄마의 유산- 도전의 항해일지> 글도 바로 이어 써보자.
은유 작가처럼 “누군가의 말문을 틔우는 작은 입김”을 만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