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꽃보다 예쁜 여자 Dec 27. 2023

하늘나라에 가신 우리 엄마

노인장기요양보험을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2020년 8월, 엄마는 갑작스럽게 간암말기, 폐전이 판정을 받으셨다. 간에는 통증을 느끼는 신경이 없어서 발견하게 되면 이미 말기라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암덩어리가 너무 커서 곧 터질지 모르니 빨리 호스피스병원으로 모시라 했다.



엄마는 어느 곳에도 가고 싶지 않아 했다. 가족에게 아마도 버려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나는 모든 일을 중단하고, 엄마가 돌아가시는 날까지 집에서 모셨다. 엄마 곁을 24시간 지키며 인근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엄마가 잠들면 새벽에는 인터넷을 뒤지며 간암에 관한 공부를 했다. 꼭 신뢰할만한 전문적인 매체에서 정확한 근거로 쓴 글을 찾았고, 그 정보도 여러 군데에서 다시 중복 확인했다. 엄마도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강하게 버텨 주셨고 나는 왠지 모르게 엄마를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혼자서 엄마를 도맡아 간병하며 지쳐가던 2021년 1월, 인터넷을 뒤지다 ‘어르신들이 자주 물어보는 말,,, 방문요양센터가 뭐 하는 곳이죠?’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지금은 따뜻한 블로그 이웃이 된 분홍빛재가 복지센터 엄재민 센터장이 정성스럽게 올리는 블로그의 제목이었다.



“요양보호사 를 파견해 주는 곳입니다. 등급을 신청해 판정을 받으면 본인 부담이 15%(기초생활 수급자는 무료)로 줄어듭니다”라는 글이었다.



엄센터장의 안내에 따라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온라인으로 장기요양등급 신청을 했다. 한 달가량 지나 1등급 판정의 장기요양인증서와 복지용구급여확인서를 받았다.





모든 등급은 지정업체에서 복지용구를 대여, 구입할 수도 있었다. 본인 부담은 모두 15%뿐이었다. 축 늘어진 엄마를 침대에서 일으키는 게 가장 힘들었기에 당장 병원에서 쓰는 자동조절 전동침대부터 대여했는데 한 달에 만원만 내면 되었다.



조금 더 빨리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8월에 엄마가 암 판정받으시고 6개월이나 지난 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양보호사 구인은 어려웠다. 엄마 집이 양주시의 외곽에 위치하고 기저귀케어도 해야 하는 힘든 1등급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암 부작용이 너무 심해 12월 초부터는 아예 항암을 중단했는데, 1월에 큰 고비가 있었다. 하루 종일 주무시고 못 일어나셨다. 이제는 정말 가망이 없나 생각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엄마는 내가 시도한 자연치유가 효험이 있었던지 기적적으로 한 달 만에 다시 일어나셨다. 그렇지만 너무 오래 누워 있어 다리 근육이 다 소실되고 서 있는 법을 잊어버리셨다.



나는 나의 두 손을 잡고 서 있는 것부터 엄마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음에, ”하나, 둘...” 세며 엄마 혼자 서 있는 연습을 했고 백까지 셀 수 있자, 걸음마를 가르쳤다. 드디어, 엄마는 한 달 만에 혼자 걷는 법을 배웠다.


거동이 힘든 엄마를 부축해 걸음마 연습을 시키려면 힘센 남자요양보호사가 낫지 않을까 해서 처음엔 남자를 알아보았으나 기저귀케어 때문에 오려는 요양보호사가 없었다. 어렵게 여자 요양보호사가 구인이 되었는데 60대의 좋은 분이었다.



요양보호사는 아침 9시부터 한시까지 근무하며 엄마의 방 청소를 비롯해 식사 준비, 설거지, 빨래 등을 다 해 주었고, 엄마에게 중요한 걸음마 연습을 시켜 주었다. 또, 엄마의 말벗이 되어 주어 나는 정말 오랜만에 시간 여유가 생겼다. 사실 그때 나의 몸무게가 내 인생 최하로 빠질 만큼 힘든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더욱 다행스러웠던 건, 내 왼발목뼈가 골절돼 한 달 동안 깁스를 해야 했는데 요양보호사가 엄마를 돌봐 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2월 말부터 요양보호사가 오기 시작해서 엄마가 돌아가신 5월 말까지 3개월간 요양보호사가 네 번 바뀌었고 일한 기간은 전부 합해 불과 두 달 정도뿐이었다.



개인 사정, 팔목 관절... 등등의 이유로 통보하고 바로 다음날부터 안 왔다. 요양보호사 급여도 일한 날짜만큼 계산하는지라 더 쉽게 결정하는 거 같았다. 아쉬운 점이었다.



분홍빛재가복지센터의 엄재민대표는 감사하게도 가끔 와서 살펴 주었다. 엄대표는 “어르신이 현재보다 조금이라도 몸 상태가 좋아질 수 있다는 마음과, 운동을 열심히 해보려는 의지가 참 강했다 “고 회상한다.


엄대표는 그때, 가족요양이라는 중요한 정보를 주었는데, 급여를 받으며 가족을 돌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모님이나 가족을 돌보고 수당을 받는 가족요양은 돌봄을 받는 가족은 요양등급을, 돌보는 가족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이 꼭 필요하다.



아쉽게도 자격증 있는 가족은 없었고,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군가 취득하기엔 이미 늦었었다. 미리 가족요양에 대해 알았더라면 준비를 했을 텐데 참 아쉬웠다.




요양보호사는 보호자를 대신해서 병원에도 같이 가준다. 엄마는 정기적으로 한 달에 두 번, 혈액검사도 종합병원에 가서 받으셨는데, 내가 발을 깁스해서 가기 힘들 때, 직접 차를 운전하고 모시고 가 주어서 다행인 적이 있었다.



요양보호사의 도움이 가장 절실했던 건 바로 엄마의 목욕이다. 혼자서 거동이 힘든 엄마를 씻기는 건 힘들 뿐 아니라 위험했다. 엄마가 목욕하다가 어지러워서 쓰러진 적이 있었는데, 너무 무거워 나의 혼자 힘으로 일으킬 수가 없던 아찔했던 순간 후, 꼭 누군가와 함께 해야 했다.



엄마는 항상 ”너 때문에 내가 살아났어 “ 하시며 고마워하셨다. 그리고 언제나 내 말을 무엇이든지 따르셨다. 아무리 힘들어도 매일 걸으며 운동하셨다.



엄재민 대표는 우리 집에 여러 번 와서 어머니를 살펴 주었었는데 “대부분 호전되려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어르신이 많지 않은데, 의지가 강했던 부분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고 말한다.




요양보호사는 매일 어머니를 모시고 집 근처 수목원에 가서 같이 걷고 가벼운 운동을 해 주었다. 엄마는 나의 엄격한 식단관리와 운동으로 많이 좋아지셨고, 4월 말에는 바다에 가고 싶어 하셔서 화진포에도 당일로 다녀왔다.


지금도 바다에 가면 엄마가 많이 생각난다. 엄마는 바다를 보고 참 좋아하셨다. 대게도 얼마나 많이 드셨던지… 엄마는 내가 작품 찍는 모습도 아주 흐뭇해하셨다.


이제는 엄마가 암을 이기시고 살아나셨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돌아가시기 삼 일 전부터 안 좋으셨다.



돌아가시던 5월 24일 아침, 엄마는 참 힘드셨을 텐데…

힘들다는 말도 안 하시고, 아무 말 없이 내 부축을 받으며 집 앞을 걸으셨다…



위의 사진들은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 예쁜 꽃과 새가 날아다니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시기를 바라며 정성껏 만든 작품이다. 아래 모자는 엄마가 즐겨 쓰시던 모자이다. 엄마는 외출할 때면 언제나 내 작품을 하시고 나가셨다.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하셨다.




장기요양보험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미리 알았더라면 엄마를 좀 더 편히 모실 수 있었다. 나 혼자 엄마를 간병하다 보니 짜증도 많이 내게 된 게 지금도 가장 마음이 아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