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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기환 May 04. 2024

추억을 덧칠하다

여행을 마치며.....

 

열흘 간의 추억 여행.

시간을 도둑맞은 듯 꿈같은 시간이 흘렀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마치 잠귀신에 홀린 듯 몇 날을 자고 또 자도 여독이 풀리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일상으로 회복될 무렵, 나는 제일 먼저 노트북을 열었다. 여행 중 틈틈이 메모를 해둔 기록과 사진들을 들춰보며, 벌써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간 듯 아득한 기억들을 모으고 모았다. 그리고 우리가 밟았던 길을 따라, 다시 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글을 써내려 갔다.


우리의 여행은 추억 위에 추억을 덧칠하는 시간여행이었다.

오래전에 그려 놓은 그림 위에 새 붓을 들고 덧칠을 하듯, 가슴에 새겨 있던 추억이라는 그림 위에 또 다른 추억을 하나씩 덧칠하면서 옛 기억을 더듬어 가는 여행이었다.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들춰질 때마다 순간순간들이 행복하고 아름다웠다.


나는 어릴 적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았다. 나이가 들면서도, 고향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마음의 고향이길 바랐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고향 마을은 육중한 고속철도가 지나가고, 그 푸르던 들판에 창고가 하나둘 들어서더니 완전히 다른 얼굴로 바뀌어갔다. 추억이 사라진 고향의 모습에서 나는 절망과도 같은 슬픔을 느꼈다.

세월이 흐른 만큼 세상도, 풍경도, 인심도 변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만고의 진리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시시각각 변해가는 인간들의 세상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억하는 것들은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무얼까? 어쩌면 가슴속 깊이 간직한 소중한 기억들이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그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가 가슴으로 기억하는 덴버는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다행히도, 덴버는 그리 많이 변하지 않은 채 우리를 반겨주었다. 우리가 살던 아파트가 그랬고, 공원, 아이들 학교, 블랙호크, 골프 코스, 한인마트, 교회, 콜로라도 대학..... 모두가 그랬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세월의 흔적만큼 조금씩은 변해 있어도, 20년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그 자리에서 우리의 추억을 간직한 채 반겨주었다. 그래서 고맙고 행복했다. 특히, 20년의 풍파 속에서도 우리를 잊지 않고 가슴으로 안아주신 단과 조시 선생님 부부는 우리 여행의 마지막을 깊은 감동과 행복으로 마무리해 주었다.


덴버의 추억


여행기간 동안 긴 시간을 차로 이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릴 적부터 커가면서 느꼈던 많은 일들, 엄마 아빠 몰래 했던 일, 부모에게 서운 했고 고마웠던 일들을 아이들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부모는 자식들을 다 알고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그 마음 제대로 다독거려주지 못한 날들이 못내 아쉬움과 아픔으로 다가왔다.


여러 날을 매 순간 함께 하다 보니,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보이고, 아이들의 생각이 보였다. 아이들이 등치만 큰 게 아니라 마음도 많이 커있음을 알았다. 부모의 삶을 이해하고, 세상을 보는 눈도 많이 밝아져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여행을 하면서, 모든 일들을 두 남매가 알아서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서 든든하고 행복했다. 집에 있을 때는 아직도 마냥 어리게만 보였던 아이들이었다. 망설이며 차일피일 미뤄오던 여행 계획을 과감히 추진하더니, 비행기, 렌터카, 호텔, 음식점 예약 등 옛날에는 내가 했던 일들을 아이들이 알아서 다 해결했다. 이제는 부모 뒤에 숨어있는 아이들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는 뒤에서 지켜보는 후원자 역할이면 충분했다.


생각해 보니, 우리 가족이 이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 했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각자  바쁘고, 자기 일에 지쳐 서로를 쳐다보고 위로해 줄 시간의 여유가 없었던 것을 이번 여행을 통해 더욱 느꼈다. 가족이란 공동체는 참으로 끈끈한 것이다. 무슨 인연이기에 이토록 질기게 이어지는 것일까? 밉다가도 미워할 수 없고, 그들 때문에 힘들다가도 그들이 있어 위로를 받는, 그런 관계가 가족이란 운명체가 아닌가 싶다.


본래 여행(travel)의 어원이 고난(travail)이라 했던가?

어쩌면 집을 떠난 순간부터 여행은 고단한 여정의 점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단했던  순간순간조차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되는 것이 여행이 아닌가 싶다. 이제 여행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꿈인 듯 아련하다. 이번 여행은 우리 가족 모두의 가슴에 가라앉아 있던 오랜 그리움의 갈증 완전히  털어낼 줄 알았다.

그러나 돌아보니 또다시 갈증은 시작되고 있다.  


언젠가 또다시 목마른 가슴을 채워줄 샘을 찾아 떠나는 날이 올 것을 믿으며 글을 맺는다.


고맙다. 덴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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