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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이 Jan 30. 2024

희생하고 봉사해야 하는 사주

신점보고 봉사활동 다니는 샤머니즘 마니아

    몇 해 전에 돈도 없고, 사람도 잃고, 건강도 버린 아주 개 같은 시기가 있었다. 돈이라도 있어야 금융치료라도 하는데, 일자리도 없어서 하루 2탕씩 면접을 다니며 이직처를 구하던 시기였다. 가고 싶은 이직처는 나를 떨어트렸고, 연봉을 13으로 나누며 ‘열정페이’로 일해주길 바라는 이직처들을 만나고 다니니 지칠 대로 지쳤다. 생일 선물로 근사한 이직처 하나 받고 싶었는데, 생일이 지나도록 면접자리를 전전하며 다니니 여간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오전은 이태원에서 면접을 보고, 동대문 면접을 기다리던 차였다. 면접과 면접 사이 빈 시간을 카페에서 보내기엔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길바닥에 앉아 멍하니 버즘 나뭇잎만 바라보고 있을 때 어떤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 신점이라도 봐볼까?


내 인생 2n년. 매년 사주를 보러 다니고, 타로 카드도 줄기차게 골라 다녔다. 샤머니즘에 환장하는 내게 신점은 최종 보스 같은 느낌이었는데, 막막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미래에 대한 힌트라도 얻고 싶었다. 기한 없는 답답함을 해소시킬 수만 있다면 통 크게 ‘10만 원은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통장 잔고를 확인하고 망설여졌다. 10만 원이라는 큰 지출을 스스로 납득시키기 위해 ‘나를 위한 생일선물’이라 중얼거리며 네이버 지도를 켜 ‘신점’이라고 검색했다. 내 500m 내 신점은 5군데. 가까운 순으로 전화를 걸었다.


    - 안녕하세요. 갑자기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혹시 오늘 신점 볼 수 있을까요? 아, 네. 예약이 꽉 찼다고요? 아, 예약이요? 아니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역시 테이블링의 나라인가. 예약 없이는 미용실도, 신점도 볼 수 없구나.

나같이 즉흥적인 사람은 아무것도 못하는 것인가. 근데 나 오늘 꼭 신점을 봐야겠어.


    - 안녕하세요. 혹시 오늘 당일 예약 가능한가요? (그새 예약이라는 용어를 배웠다.) 아. 안된다고요?.. 저녁 여덟 시요?


가장 멀리 있던 무당 집에서 저녁 8시에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지금 시간은 오후 5시 10분 전. 면접을 보고 와도 6시면 끝이 나 2시간이나 시간이 빈다. 그래도 신점을 봐야겠어.


    - 네, 네! 가능합니다. 예약해 주세요.


예약을 하고 면접에 다녀왔다. 역시 이번 면접도 엉망이었다.

길가 벤치에 앉아 버티길 1시간, 길에서 버텨보려 했건만 해가 지면서 날이 쌀쌀해졌다. 돈도 없는데 춥고, 배도 고팠다.

아, 이게 바로 거지꼴이라는 거구나. 그렇게 다시 버즘나무 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1시간을 버텼다.


8시가 되기 15분 전, 슬슬 무당집을 향해 걸어갔다. 분명 저녁 8시밖에 안 됐는데 이 동네는 왜 이렇게 어둡고, 사람이 없는지. 약간 무서워진다. 건물 5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되는데, 웬걸. 계단은 조명 하나 들어오지 않는 오래된 상가 건물이었다. 한 칸 한 칸 어두운 계단을 올라가니 무서움이 고조에 이를 때 무당님(뭐라 불러야 될지 모르니 이렇게 부르겠다.)께서 문을 열고, 내 이름을 확인했다. 아니, 무당님. 저 아직 문도 안 두드렸는데요. 더 무섭잖아요.

재단이 있는 방에서 무당과 마주 보고 앉아 이름과 태어난 년도를 말했다. 무당은 옆에 있던 종을 짤랑-하고 치더니 노트에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메모를 했다.


    - 박이씨는 평생 봉사하고, 희생해야 될 팔자입니다.


아니, 무당 선생님. 이게 무슨 소리예요. 희생할 팔자도 억울한데 갑자기 ‘평생’ 희생해야 될 팔자라니요.


    - 박이님이 잘 풀리려면 직업도 봉사하고 베풀 수 있는 직업을 갖는 게 좋아요. 의료인이나 복지사 같이 남들을 돕는 일이요.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의료인이나 복지사는 ‘남을 돕는다.’는 숭고한 신념도 가져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냥 나 잘되라고 직업 선택 해도 되는 건가요? 아니, 그전에 저는 학업에 대한 끈기와 열정, 이런 게 없어요. 그냥 한마디로 공부 못한다고요. 원해도 할 수 없는 직업이잖아요. 머릿속으로 물음표만 수만 개가 떠올랐지만 질문의 꼬리를 끊고, 입을 떼었다.


    - 저는 디자이너인데요. 공익을 위한 디자인이라면 모를까 사익을 위해 디자인하는 디자이너예요.

    - 직업이 봉사하는 직업이 아니라면 봉사활동이나 기부라도 꾸준히 하시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희생하는 사주는 계속 희생하는 일만 해왔을 가능성이 높아요.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고생해서 부흥시키거나 이런 일이요. 본인도 모르게 희생하고 봉사하며 살았을 거예요. 하지만 사주를 따르지 않고 살면 일이 잘 안 풀리는 시기가 옵니다.


그래서 제 통장 잔고가 비어있는 걸까요? 제가 봉사와 희생을 하지 않아서요. 아, 그래서 제 학생기록부에는 항상 ’ 봉사‘하는 학생이라고 쓰여있는 걸까요? 심지어 유치원 때 받은 최초의 상장이 ’ 착한 어린이 상‘이던데 이게 다 사주 때문일까요?

생각해 보니 학생 때 꿈이 주머니에 만 원짜리 열 장을 들고 다니며, 노숙자분께 만원 한 장씩 드리는 게 꿈인 학생이었는데 그게 다 ’ 봉사해야 하는 사주‘여서 그럴까요? 근데 이제 그런 마음조차 들지 않고 살아서 그런 걸까요?


    - 그러면 봉사활동이나 기부를 하면 좀 나을까요?

    - 네. 좋은 기운이 생길 겁니다.


삶이 너무 답답해서일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집에 가는 버스에서 10년 만에 1365 봉사활동 사이트 접속을 했다. [개인 봉사활동]이란 글자를 눌러 집 주변에서 할 수 있는 봉사활동을 신청했다. 첫 봉사활동은 박물관 보조 선생님이었는데 웬걸. 첫 봉사를 하고 박물관을 나서자마자 가고 싶었던 1순위, 2순위 회사에서 합격했다.

아니, 이럴 수가! 봉사하면 진짜 제게 좋은 기운이 생긴다는 게 사실인가요? 신령님. 저 착한 일 많이 하고 살게요. 저 좀 잘 살게 해 주세요.


우연인지 좋은 기운이 들어온 건지 알 순 없지만, ‘봉사=좋은 기운 발생=나 잘 살 수 있음’이라고 결론지으며 사심 가득한 염세적인 봉사를 계속했다. 어느 날은 어린이 (보조) 선생님이 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전시장 큐레이터(라고 쓰고 그림 경호원이라 읽는다.)도 해보고, 도서관 사서(라지만 청소부)도 됐다.

내가 하는 봉사는 '희생정신으로 하는 봉사'와는 조금 달랐다. 숭고한 희생 정신과 ‘타인을 돕는다’는 이타적인 마음만으로 봉사를 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철저히 내가 되는 일정 한에서 내가 피곤하지 않을 정도에 시간으로, 내가 관심 가는 분야 봉사활동만 골라 다녔다. 그렇지만 관심 가는 직업군의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재미를 붙이게 되었고, 다른 사람을 도왔을 때 느낄 수 있는 뿌듯함은 엄청난 만족감을 주었다. 마치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부탁한 심부름을 하고, 수업 종 친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반에 돌아가던 때 느낄 수 있던 날것 그대로의 뿌듯함이었다. 이 기분 좋은 마음을 공유하고 싶어서 봉사활동을 여기저기 추천하고 다녔다.


지금도 봉사활동을 다니냐는 물음에는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아니요. 이제 제 살기 바빠서요. 돈으로 따뜻한 마음을 나눕니다.'

배가 불러서일까. 예전만큼 자주 봉사활동을 하진 못하지만, 구세군 냄비나 지역 곳곳에 놓인 기부함에 가진 현금 중 가장 깨끗한 돈을 넣으면서 바란다.


신령님. 만원을 넣으면 7천원은 기부를 받은 사람에게 좋은 기운을 주셔요. 그리고 딱 3천원만큼의 좋은 기운은 제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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