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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박이 Mar 01. 2024

입춘(立春)

추운 겨울을 보낸 식물이 이듬해 봄에 더 크고 풍성하게 자란다.

마음이 어수선하다.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머리를 울리고,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신경을 사납게 한다.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고자 오늘도 화분을 들었다.


     지난봄, 회사에서 복에 겨운 감투를 받아썼다. 부담스럽고 쑥스러웠지만 지금까지 견뎌온 것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아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기분 좋음도 잠시뿐, 감투를 받아쓰자마자 여태껏 해본 적 없는 일을 맡겨 되었다. 직전까진 내 일만 잘하면 되는 '손발' 역할만 해내면 됐다. 하지만 감투를 쓴 이상 나는 더 이상 손발 역할만 할 순 없었다. 이제는 허리 역할을 해내야 했다.


허리 역할은 쉽게 말해 중간자 역할이었다. 경영진과 실무진의 중간자이며, 클라이언트와 회사의 중간자이기도 했고, 프리랜서와 팀원 간의 중간자이기도 했다. 한마디로 얼굴 겸 욕받이인 셈이다.


중간자는 귀가 얼얼할 정도로 모든 이의 의견을 듣고, 편집의 편집의 편집을 거쳐 예쁘게 포장하여 상대에게 전달했다. 그래도 상대는 대부분 부정으로 답했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조율하고, 조율하고, 또 조율해야 했다. 내 말 한마디에 모든 일정이 왔다 갔다 하고, 팀원들의 고생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게다가 조율된 의견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책임져야 했다. 켜보기만 했을 땐 몰랐는데 이 자리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어찌어찌 앉은 자리지만, 앉아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버텨내기로 했다. 태 그랬으니까.


맹랑했던 다짐과 다르게 상황은 쉽지 않았다. 도저히 조율되지 않는 일정들, 의견과 이견의 대립, 그 사이에 일어나는 균열들,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말소리와 울음 섞인 목소리.


길을 걷는데 발이 동동 떠있어서 땅을 밟는 건지 물을 밟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 자리에 앉은 이상 원하는 바를 이뤄주어야 하는데, 점점 감투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조차 힘에 부친다. 머리는 조여 오고, 가슴이 콱 막힌 것 같아서 밖으로 뛰쳐나가 소리 지르는 날들이 생겼다. 내가 바라봤던 선배들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선배들과 같은 직급을 달았지만 내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


    - 아, 이렇게 살고 싶진 않았는데.


지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걸려오는 전화와 그 사이 쌓인 부재중 전화. 사람 목소리에 진저리가 난다.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와 문 앞에서 크게 숨을 들이켜고, 가는 숨을 내쉬어 본다. 마음을 다잡고 들어간 미팅 중에는 속이 매스껍다 못해 구역질이 나서 회의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귀가 멍해지더니 고막을 찢을 듯한 이명이 들려온다. 호흡이 가파지더니 손발이 오그라든다. 손에 들린 서류 뭉치를 땅바닥에 집어던지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꽉 막힌 가슴을 퍽퍽 쳐대며 금수처럼 울부짖었다. 공황발작이었다.


그때는 그게 공황인지 몰랐다. 그냥 조금 지쳤다 생각했다. 하지만 한번 발현된 공황발작은 일상 곳곳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출근길, 퇴근길, 대면 미팅 후, 유선 미팅 후, 어떨 땐 대화하다가도 울컥울컥 올라왔다. 내가 겪은 공황발작은 숨이 막히는 것으로 시작해서, 심장이 터질 듯한 혼돈을 겪어대다 엉망이 된 몰골로 끝이 났다. 공황이 올 것 같으면 인적 드문 곳에 가 바들바들 떨어대며, 의미 없는 ‘괜찮아.’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이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내가 내가 아닌 것 같다. 사람이 싫다. 점점 목소리뿐만 아니라 모든 소리가 신경을 긁는다. 하루 종일 귀마개를 끼고 있었다. 귀를 틀어막고 겨우 내 숨소리만 들리는 공허에 앉아 넋 놓고 있었다.


    머리 꼭대기에서 해가 놀아대던 여름날, 식물은 햇살에 놀아나듯 푸르다 못해 퍼런 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그 퍼런 잎을 바라보다 ‘힘에 겨우면 말 없는 것들에 애정을 쏟는다.’는 말이 생각나 할머니 정원에 가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왔다. 공중 뿌리가 서넛 달린 나뭇가지였다.


그 가지를 마디마다 잘라 항아리에 넣고 찬물을 확- 부어 빛이 잘 드는 창가에 두었다. 죽을지 살지 모르는 물에 잠긴 짧은 나뭇가지를 바라보니 ‘그냥 화분을 하나 사 올 걸 그랬나.’ 싶었다. 어차피 화분을 사 올 기력도 없으니 그냥저냥 키워보기로 했다.


    - 출입문 보안 장치를 해제합니다.


    기계의 밝은 목소리를 뒤로하고, 터벅터벅 걸어가 컴퓨터 본체에 전원을 넣고 탕비실에 갔다. 지난날의 컵을 설거지하다 가지 넣은 항아리가 시야에 걸렸다.


    - 맞다! 물 갈아줘야지.


주말을 새고 나니 하얀 뿌리가 났다. 길이로 따지자면 2mm 정도 되는 짧은 뿌리었다. 물만 넣어주어도 제 할 일을 해낸 뿌리가 얼마나 기특하던지. 가슴 깊숙한 곳부터 간질간질하더니 큰 들숨과 긴 날숨이 나왔다.


두어 개 났던 뿌리 꽤 뭉텅이가 돼서 화분을 가져와 흙에 심어주었다. 물과 흙, 상반된 환경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는지, 며칠은 반응이 없다가 씨눈 하나 나왔다. 쌀알만 하던 씨눈은 눈 깜짝할 새에 손가락만한 잎이 되었다. 매일 자라나는 잎을 보면 이유 모를 안정감이 들었다.

식물을 들인 후 일과에 큰 변화가 생겼다. 아침에 찬물을 주고, 공기가 통하게 창을 열어준다. 점심엔 아침보다 조금 더 자란 잎을 보았다. 저녁에는 밤바람에 잎이 무를까 창을 닫고, 화분에게 인사했다. 안녕, 나 내일 또 올게. 물을 주고, 잎을 정돈하는 시간 다 합쳐도 2분 언저리. 고작 그 2분이 지옥 같던 여름을 살게 했다.


    어수선한 마음은 여름날의 햇살 앞에서 잠시 수그러들다 다시 날이 서기 시작했다. 가을이 왔다. 바람이 차지자 잎이 바싹 메말라가더니 누렇게 뜬 잎은 화분 바깥으로 떨어졌다. 덩달아 나도 쥐고 있던 것을 탁- 놓아버렸다. 늦가을에 잎이 다 떨어진 앙상한 화분을 들고 회사를 나왔다.


여름날의 나를 살게 한 화분은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면서 방구석 어딘가에 무심히 놓아두었다. 그해 겨울은 어떤 겨울보다 매섭게 춥고, 외로웠다. 수시로 오는 공황발작과 사람 존재 자체가 버거워지면서 가족도 친구도 전부 피해 다녔다. SNS를 끄고, 연락망도 닫았다. 낮 동안 집에 혼자 있다가 가족이 오는 저녁 대가 되면 후드티 하나를 뒤집어쓰고, 집 밖으로 나와 밤거리를 나돌았다. 돈 없고, 갈 곳 없는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도 없는 개천이나 새벽녘 사우나였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입춘(:드는 봄)이 왔다. 겨우내 앙상하던 가지는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 씨눈을 틔웠다. 입춘이 왔지만 봄을 시샘하듯 눈이 내리고, 찬 바람이 불었다. 그 시샘을 비웃기라도 하듯 식물은 굴하지 않고, 막 자란 노란 잎을 틔웠다. 샛노란 잎이 담긴 화분 꼴이 영 말이 아니다. 봄이 들었으니 분갈이를 해줘야지.


갈퀴로 화분 겉을 툭툭 쳐내며 앙상한 가지를 뽑으니 화분 바깥까지 뿌리가 길게 자라 있었다. 겨우내 흙 바깥에서 앙상한 가지에 응애가 창궐해도, 흙 안에서는 끊임없이 꿈틀대며 뿌리를 내렸다. 겨울 동안 자의성 죽음을 생각했다가 무력감에 쓰러졌다가 우울했다가를 반복하며 고요한 내면에 잠식되었다. ‘딱 하루만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에 제 발로 상담 센터에 찾아가 내면의 뿌리를 마주했다. 쉽게 해결되면 좋으련만 그 뿌리는 너무 질겨서 마음을 헤집어 놨다가, 정리했다가, 다시 부숴버리길 반복했다. 헤집어진 마음에 틈이라도 생긴 건지 그 틈을 비집고 소리가 들려온다. 소리가 들려오고, 사람이 들어오고, 바램이 불어왔다. 이제는 가장 괴로웠던 장소에 가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들이쉰 만큼 내쉴 수 있게 됐다. 느리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추운 겨울을 보낸 식물이 이듬해 봄에 더 크고 풍성하게 자란다. 겨울에도 봄에도 자란다.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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