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 나오시마
게스트하우스를 떠나 아침 8시에 길을 나섰다. 평일이라 그런지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등교를 하고 있었다. 몇 년이고 몇 십 년이고 이런 풍경으로 등교를 할 것만 같았다. 어쩐지 활기차 보이는 학생들을 보면서 나도 일본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했더라면… 하고 생각하며 부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침에 사장님이 아침 먹을 곳을 추천해 주셨는데, 유명한 곳이란다. 그런데 역시 우동집이었다. 이곳은 우동이 마치 한국의 국밥 같은 것인가 보다. 아침에도 먹고 점심에도 먹고 저녁에도 우동을 먹는다. 가보니 '우동바카이치다이' (우동바보1대) 라는 허름한 간판이 있었다. 가게 자체는 시골에 있을만한 아주 평범한 가게였는데, 평일 이른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테이블의 많은 부분이 이미 차 있었다. 주말에는 2시간씩 줄을 설 수도 있다고 하니 진짜 맛집인 것 같았다. 가게를 둘러보니 유명인사들의 싸인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이곳 카가와에서는 우동의 면을 아주 중시해서 토핑이나 육수에는 그다지 공을 들이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가마타마 우동이라고 정말 약간의 뜨거운 면수 (육수도 아닌)에 계란만 넣어서 면을 비벼 먹는 경우도 있고, 전날 먹었던 자루우동처럼 간장베이스 육수에 면을 찍어먹는 경우도 있다. 나 같은 한국인은 그런 게 좀 심심한지라 이것저것 올리고 싶었고 고기, 계란, 그리고 튀김을 얹어먹었다. 그래도 좋은 것이 호사를 부려 이것저것 얹어먹어도 보통 6천원, 7천 원을 넘는 경우는 없다. 한 입 먹었는데, 여기도 너무 맛있었다. 여기서는 어디에서 우동을 먹어도 실패가 없다. 육수가 없고 면을 끓인 면수에 면 그리고 내가 주문한 추가토핑이 있었는데, 면이 너무 맛있어서 면만 씹어도 밀가루의 고소한 내음과 쫄깃한 면발이 은은한 조화를 이룬다. 대개는 이토록 육수에 성의가 없을 정도인데, 면이 너무 맛있어서 대개는 납득이 간다. 그러다 입이 조금 심심해지면 스시에 간장 뿌리듯 살짝 간장을 뿌려 먹는다.
우동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나오시마를 가기 위해서 타카마쓰항으로 올라왔다. 나오시마는 세토내해에 있는 섬으로 여러 예술작품들과 미술관들로 아주 유명한 곳이다. 전날까지도 나오시마를 갈까 쇼도지마를 갈까 고민을 하다가, 마침 나오시마 지중미술관 입장티켓이 조금이나마 남았길래 정말 전날에 나오시마를 가기로 결정해 버렸다. 배를 타고 30분쯤 갔을까. 나오시마에 도착했다. 예술의 섬이라더니 벌써부터 조형물들도 해변에 간간이 보이고, 매표소도 안도 다다오의 시멘트 건축물처럼 왠지 예술적이었다.
지중미술관은 예약제인 데다가 정해진 시간에 가야 하여 먼저 지중미술관으로 향했다. 불편하게도 배에서 내리고 버스를 타고 '츠츠지소'라는 곳까지 가야 하는데, 또 버스를 한 번 더 갈아타야 지중미술관으로 갈 수가 있다. 그런데 섬의 유창한 나무, 꽃들과 가끔 보이는 예술작품들이 너무 조화를 이루어서 가는 길조차 심심하지 않고 설레었다. 츠츠지소에 도착해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잔잔히 부는 바닷바람이 이제 조금 있으면 여름이구나 하는 자연의 울림 같은 것을 주었다. 선선한 바닷바람 맞으며 있으니 어디선가 옛날 일본 노래가 들려온다. 일본어로 '바다여, 바다여, 거대한 바다여…' 하고 인근 녹음기에서 들려오는데 어쩐지 트로트 같기도 하고 구성지기도 해서 자꾸만 귀에 익게 되었다. 찾아보니 '오야지노우미' (아버지의 바다)라는 곡이었고, 곡이 자꾸 귀에 붙어서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계속 들었더란다.
츠츠지소에서 지중미술관에 도착하니 자그마치 30분 넘게 늦어버렸다. 늦어서 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면서도 울창한 나무와 이름 모를 꽃들이 자꾸 눈에 밟혀서 나도 모르게 셔터를 여러 번 누르고서야 미술관에 입장을 했다. 다행히도 퇴짜 놓지 않고 평범하게 바로 들여보내주었다.
나오시마에는 꽤 유명한 미술관들이 몇몇 있는데, 대표적으로 가장 유명한 지중미술관, 이우환 미술관 (한국인 맞다), 베넷세 하우스 뮤지엄 등이 있다. 유명한 미술관이 많을 뿐만 아니라, 작은 미술관들도 있고, 예술 프로젝트도 마을 곳곳에 열려서 정말 섬 전체가 하나의 예술처럼 보일 정도이다.
여기 지중미술관은 일본에서 매우 유명한 건축가인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곳이다. 안도 다다오는 시멘트를 드러낸 건축방식을 고수하기로 유명한데, 이곳 미술관도 역시 그의 건축방식에 걸맞게 벽면이 모조리 칠하지 않은 회백색의 시멘트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시멘트 면으로 되어있는 미술관이 땅에 박혀있는 것처럼 되어있는데 이름 그대로 '지중' (땅 안) 미술관이었다.
가보니 이런 시멘트 미술관의 특성을 잘 살린 설치미술들이 많았다. 일반적인 그림이라곤 모네의 수련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하나의 큰 그림이었다. 미술에는 문외한이다만, 이렇게 큰 수련 그림이 있다는 것은 처음 알게 되었다. 온통 회벽으로 둘러싸인 시멘트에 떡하니 크게 걸린 수련이 이질감을 보이면서 동시에 조화를 이루어 아주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그 밖에도 여러 층으로 된 시멘트 계단에 거대한 금속 공들을 설치한 작품도 있었고, 시멘트 천장에 네모난 구멍만을 뚫어 하늘의 구름을 작품으로 삼은 설치미술도 있었다. 시멘트 사이의 빛을 활용한 작품들이 많았는데, 지중미술관이라는 공간의 특징을 정말 잘 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관을 도는데 약 1시간이 걸렸고, 살짝 더워져서 휴게소에서 아이스커피를 한잔 마셨다. 커피를 내려주는 것도 아니고 커피를 어떤 팩에서 꺼내더니 얼음에 타서 주었다. 몹시도 실망스러웠다. 당연히 바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물에 타줄 줄 알았는데… 그래도 여기는 풍경값이 50점 이상은 먹고 들어가는지라, 휴게실 창으로 보이는 세토내해를 보면서 마시는 커피가 썩 나쁘진 않았다.
지중미술관에서 나와서 섬 외곽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지중미술관 빼고는 뭘 꼭 봐야겠다고 한 것이 없는지라, 섬의 나무와 꽃을 보면서 걸었다. 걷다 보니 이우환 미술관이 나왔다. 이전에 한국에 있는 전시회에서 이우환의 작품은 점이나 선을 중첩해서 찍어 여백이 느껴졌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알던 미술가의 이름이 나온지라 조금은 반가웠고, 한국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라 신기하기도 하였다.
이곳 이우환 미술관에는 앞에 큰 뜰 같은 것이 있었는데, 역시나 시멘트를 이용한 공간이 인상 깊었다. 중앙에는 오벨리스크 같이 얇고 긴 조형물이 있어서 주변의 울창한 나무, 그리고 시멘트의 여백과 대조되니 굉장히 도드라져 보였다. 찾아보니 이곳 이우환 미술관도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곳이라 그런지, 이런 시멘트의 차가움과 자연의 울창함이 잘 대조된다는 생각이 더욱이 들게 되었다.
이우환 미술관은 들어가지 않고, 계속 섬의 외곽을 따라 걷다 보니, 푸르른 세토내해와 함께 간간히 설치된 조형물이 나무들과 들판들 사이에서 튀어나와서 심심치가 않았다. 더 걷다 보니 해수욕장처럼 잘 정돈된 해안가에 뜬금없이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이 놓여있었다. 나오시마를 걷다 보면 이런 뜬금없는 조형물들이 이따금씩 나타나는데, 섬의 자연과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좀 더 걸어서 나오시마의 '혼무라'라는 곳에 도달했는데, 민가들이 있는 마을이었다. 아까 미술관을 보고 1시간 넘게 걸은지라 배가 고파서 구글로 빠르게 맛집을 찾아보았는데, 마침 '오쿠무라'라는 카페 겸 식당이 있어 들어가서 오므라이스를 시켰다. 주문을 일본어로 했더니 종업원이 일본어로 말을 걸어준다. '한국 분이시죠?' '네, 어떻게 아셨어요?' '뭔가 알 것 같아요' '어떻게 알아챘는지 궁금한데요? 발음 때문인가…' 그밖에 한국인은 많이 오는지, 저희 가게는 어떻게 알고 왔는지 등등 잡다한 얘기를 밥 먹으면서 가끔씩 했다.
카레와 토마토소스로 토핑 한듯한 오므라이스가 나왔다. 위에 있는 계란이 겉보기에도 참 부드러워 보였다. 진하게 우려낸 소스와 부드러운 계란의 조합이 좋았다. 엄청나게 고급 식재료를 쓴 것이 아니지만, 깔끔하게 허기를 지워내기에 제격인 맛이었다.
가게를 나와서 동네를 조금 산책했다. 신사도 구경을 하고, 동네 집들도 구경을 했다. 그런데, 여기도 역시 나오시마인가. '이에 프로젝트'라는 예술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이에는 일본어로 집이라는 뜻인데, 오래된 가옥을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하는 프로젝트였다. 1050엔을 내고 티켓을 받으면 7개의 집을 구경할 수 있는데, 7개의 집이 붙어있지 않고 혼무라 곳곳에 흩어져있어서 찾아다니면서 마을을 구경하는 맛도 있다.
7개 모두 생각은 다 일일이 나지 않다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미나미데라'라는 곳이었다. 불빛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는 곳에 들어가서 앉아있는데, 고요한 기분, 그리고 약간의 무력한 기분도 느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안에 있는 가이드 분이 '이제 보일 겁니다' 하는 말을 듣자마자 정말 주변의 사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눈이 주변 명암에 따라 적응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칠흑 같은 곳에서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신기했고, 그 시간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어떤 철학적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 밖에 기억에 남는 것은 '이시바시'라는 집이었는데, 예전에 '이시바시'씨가 살던 집을 개조한 곳이라고 한다. 멋들어진 일본식 가옥에 대자연을 담은 수묵화 같은 것이 문에 많이 그려져 있는데, 사실은 은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은이 산화되면서 그림은 점점 검게 변하는데, 일본의 '이치고이치에'를 철학적으로 담은 그림이라고 한다. 뭔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 가이드 분이랑도 제법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무래도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낯선 이들에게 말을 걸일 도, 걸릴 일도 많은 것 같다. 이전에 미술 선생님이었다가 지금 은퇴해서 이렇듯 가이드 일을 하고 계신다고 했는데, 나이 많은 분들도 나름대로 본인의 전공을 조금이나마 살려서 계속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좋게 보였다.
7개의 집을 보고 이제 나오시마를 떠나려니 예술이 아닌 나오시마 민가들을 조금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항구 쪽으로 가는데 외곽이 아니라 섬 중심을 통해서 1시간을 넘게 걸었다. 걷다 보니 여느 일본 시골과 비슷하면서도 지나가면서 보이는 초등학교, 유치원, 그리고 맨션들이 정겹게 보였다. 속으로 이웃들과 매일 아침마다 인사를 하겠지 하고 부러운 기분이 들었다.
항구가 있는 미야노우라에 왔는데, 배를 타는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지났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인근 가게에 들어가 일본식 카레를 시켰는데, 한국 카레처럼 건더기가 많은 것은 아니나 진하게 우려낸 카레가 허기를 빠르게 가셔주는 것 같았다. 카레로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배를 기다리니 7시가 넘어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항구 주변의 조형물들도 불을 밝히니 석양과 부각되어 좀 더 예뻐 보였다.
배를 타고 다시 타카마쓰의 게스트하우스로 오니 오후 8시가 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