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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생 Jan 30. 2024

#03 깊은 밤, 깊은 차

입문자 차준생의 茶이야기

<차준생 개인작품 - 깊은 밤, 깊은 차>

나는 보통 늦은 시각, 모든 일과를 마친 깊은 밤에 차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게 늦은 시간 때에 차를 즐기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정리가 되기도 하고, 머릿속 어딘가에 잊거나 덮어 두었던 문제들을 다시 꺼내어 고민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홀로 생각하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때로는 덮어뒀던 지난날의 과오나 후회들을 잘못 들추어 밤 잠을 도둑맞기도 하고, 때로는 전혀 엉뚱한 해답에 도달하여, 오답인 줄도 모른 체 홀로 확신에 차 폭주하기도 한다.


이렇듯 혼자 하는 생각이 길 수록, 고민이 깊을수록, 점점 더 그 망상의 함정에 깊게 빠져, 해어 나올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이럴 때 가끔은 작게나마 차가 도움이 될 때도 있는데, 뜨거운 찻물을 마시면 그 뜨거운 것이 내 목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 마치 내 속에 응어리지고 기름진 무언가를 같이 녹이고 씻어 내려가는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그리고는 뜨거운 것이 내려간 자리에는 깊고 뜨거운 한숨과 함께 약간의 시원함이 남는다.

왠지 그 한숨 속에는 나의 온갖 불순물들이 함께 배출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든다.


그리고 몇몇 차들 중에는, 온도나 물, 우려내는 방법에 따라 아주 민감하게 맛이 변하는 차들도 있다.

작은 실수로 혹은 잠깐의 착오로 쉽게 쓰고 떫어지기도 하는데, 이런 차를 우려낼 때에는 집중을 하지 못하고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 보면, 필시 그날은 쓰고 떫은 차를 마시게 되기 때문에 상당한 집중을 요하는 작업이며, 이런 집중을 요하는 작업만큼 이런저런 잡념과 망상을 떨쳐버리는 일에 도움이 되는 일은 흔치 않다.

(글은 이렇게 쓰지만, 여전히 나는 자주 쓰고 떫은 차를 마신다.)


물론 차가 고민이나 망상에 직접적인 해결방안을 재시해 주거나, 혹은 망상이나 생각을 멈춰주지는 않지만, 한 번쯤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이런 짙은 망상들을 조금은 엷게 희석해 주는 것도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애당초 한 번 핀트가 벗어난 생각들은 이런저런 고민들과 합쳐져, 결국 거대해져 간다. 이 거대해진 망상은 매서운 바다가 되어, 깊은 밤을 잠식해 버리고 만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무력하게 이불속에서 눈을 꼭 감고 부디 속히 단잠이 내게 찾아오기를 기도하는 일뿐이다. 무력하지만 나는 아직 다른 방법은 잘 모르겠다. 


혹시 나와 같이 깊은 밤 갖가지 망상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면, 꼭 한번 차를 권하고 싶다.

앞서 말했듯 해결 방법은 재시해줄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거대한 망상의 바다에 조금씩 뜨거운 찻물을 들이붓다 보면 어느새 미지근해지고 잠잠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아직 나는 입문자라 여전히 그 바다가 매섭고 차가운 것이라고, 이렇게 뜨거운 물을 붓다 보면 미지근해져, 잠잠해질 거라고 생각해 본다. 

오늘도 그 불쾌하고 쾌쾌 묵은 망상들에 뜨거운 찻물을 부으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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