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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준생 Feb 06. 2024

#05 결국, 왈칵 넘쳐 버렸다.

입문자 차준생의 茶이야기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꺼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름 조심한다고 조심했는데,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나보다. 특히나 요즘 이런 저런 글을 쓴다는 이유로 내방에 놓인 캠핑용 의자와 탁자에서 차를 마시던 것을 옮겨 좁디 좁은 컴퓨터 책상에서 차를 마시기 시작 하면서 부터, 언젠가 뭐 하나 잘못 건드려 사단을 낼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는데, 그것이 오늘인가보다. 다행히 엎질러 버린것은 아니고, 차를 우리기 위해 따르던 찻물을 넘치도록 따라 버렸다. 그것도 한 참을 말이다. 


내 방에는 제법 큰 러그가 깔려있는데, 결국 넘친 물은 바닥의 러그까지 적셔 버렸다.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키보드와 마우스를 치우고, 수건을 찾아 닦으려는데, 이미 늦었다. 찻물들은 넘쳐 흘러 컴퓨터책상위 마우스패드와 바닥 러그에 다 흘러 스며들어 버렸다. 오늘 마시던 차는 보이 숙차였는데, 제법 구수하고 맛있게 우려져 내심 흡족해 하며 아주 맛있게 즐기고 있었는데, 상당히 아쉬웠다. 적어도 찻잔으로 2~3잔 정도는 흘러 넘친것 같다. 어찌되었든 이리저리 수건으로 대충 훓어 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가 대체 무엇에 정신이 팔려 이런 사단이 나게 되었을까?, 도무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방금 흘러넘친 차들과 함께 내 기억도 흘러 넘쳐 버린것 같다. 아니면 애당초 아무생각없이 멍 하니 차를 내리다가 이런 사단을 낸것인지. 불과 몇분전까지만 해도 온갖 정신을 쏟으며 차가 넘치는 줄도 모르게 골돌히 생각하고 있었을텐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어쩌면 이렇게 흘려 버리는 것이 더 좋을 생각이였을수도 있고, 이렇게 쉽게 잃어버리면 안될 생각이였을 지도 모르겠지만, 난 전자일꺼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단기간에 기억을 잊는다는것에 내 나쁜 머리를 한탄 하며, 잠시 머리나 혹은 정신건강에 문제가 생긴것인가 고민이 들려던 찰라에 얼른 책을 잡았다. 그런 잡생각을 하느니 책이라도 보면서 좀 더 가볍고 즐거운 상상을 해 볼 요량이였다. 마침 책에는 에메랄드 빛 파란색 고양이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역시 파란색 고양이라면 도라에몽 밖에 모르겠는데...'라는 이런 바보같은 생각들과 함께 책을 읽으며, 아직 남은 차를 홀짝였다. 다행히 아직 온기가 남아 있어서 맛이 좋았다.


그렇게 책을 펴고 한참을 책을 읽는 동안, 향긋하고 구수한 차향이 내방에 가득 매워졌다. 넘쳐버린 차들은 조금 아쉽지만, 향긋한 향기 또한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흘러 넘친것은 이미 주어담을수도 없으니, 이 향기라도 남은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살면서 나는 내 실수로 혹은 오판으로 얼마나 많은것을 쏟아 버리고, 넘쳐 버렸을까? 그렇게 버려져 버린 것들이 향기라도 남겨 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부디 러그에 얼룩만 지지 않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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