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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문 Mar 13. 2024

젊은 크론병 환자의 자취 (상)

내가 서울에서 자취를 하며 2023년 1월 30일에 쓴 일기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나의 프로젝트 팀원은 심근경색을 앓고 있다.
나는 크론병으로 심하게 아팠을 때 그냥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는 오랜 기간 죽지 못해 아픈 크론병보다는 짧고 굵은 고통으로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심근경색이 더 좋아 보인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때부터 난 이미 건강 문제들로 인한 우울증을 겪고 있던 것 같다. 내가 이런 일기를 쓴 배경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첫 자취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나의 기억을 풀어본다.







크론병은 입에서 항문까지 소화관 전체에 걸쳐 어느 부위에서든지 발생할 수 있는 만성 염증성 장질환이다.

크론병의 원인은 아직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환경적 요인, 유전적 요인과 함께 소화관 내에 정상적으로 존재하는 장내 세균총에 대한 우리 몸의 과도한 면역반응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가장 흔히 호소하는 증상은 설사, 복통, 체중감소이며, 전신 쇠약감, 식욕 부진, 미열 등의 증상이 동반될 수 있다. 관절염, 피부 증상, 안구 병변, 섬유화 등이 일어나 담관벽이 두꺼워지면서 담관이 좁아지거나 협착이 생기는 경화성 담관염, 신장 결석 등의 장관 외 증상도 비교적 자주 나타난다.

크론병은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으로 현재의 의학 기술로 완치가 불가능한 난치병이다. 크론병의 치료 목표는 질병의 관해를 유도하고 유지하여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이며, 질병의 진행을 막아서 합병증을 예방하는 것도 중요한 치료 목표이다.

-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나는 2013년 재수 중에 크론병을 확진받았다. 동네 외과에서 1번, 대학 병원에서 3번 총 4번의 수술을 했고 회복하는데 2년이 걸렸다. 2015년 여름이 돼서야 다시 수능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명문대를 가고 싶어 시작한 재수였지만 그 꿈은 2013년 말 크론병을 확진받으며 사라진 지 오래였다. 명문대를 다닌다 한들 혼자서 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크론병과 둘이서 잘 지낼 자신이 없었다. 그저 평생 엄마가 해주는 밥만 먹으며 엄마의 보호 아래에서 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랬던 내게 무슨 바람이 든 건지 2022년 1월 나는 서울에 가서 혼자 지내며 코딩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크론병으로 인한 건강 상태가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크론병 치료 최후의 단계인 생물학적 제제 주사 치료까지 시작했을 만큼 내 상태는 과거보다 악화돼 있었다.





위의 피라미드 그림처럼 크론병의 중증도에 따라 아래에서 윗 방향으로 치료를 진행한다





크론병 주사 치료제(생물학적 제제)는 아래 사진처럼 성분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다. 주사제 가격은 약물의 종류와 투약 용량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략 2 ~ 3개월마다 250만 원 정도의 비용이 든다. 다행히 환자들의 천국인 우리나라에선 크론병을 희귀 질환으로 인정해 산정특례가 적용되므로 크론병 환자는 전체 비용 중 10%만 내면 된다. 대신 한번 사용했던 약물을 다른 약물로 바꿨다가 다시 사용하게 되면 산정특례가 적용되지 않으므로 크론병 환자는 어떤 주사제를 사용할지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









내가 다니는 병원은 레미케이드, 휴미라, 스텔라라 중 하나를 고를 수 있었다. 셋 중 하나를 고르라니 마치 인생을 건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오랜 고민 끝에 스텔라라를 골랐다. 스텔라라가 가장 최근에 나와서 부작용이 적다고 했기 때문이다. 허나 재수 없게도 나와 스텔라라는 궁합이 안 좋았다. 일상에서의 가위바위보 승률은 높았는데 하필 제일 중요한 인생을 건 가위바위보를 져 버렸다. 이미 주사제를 고른 이상 최대한 오랫동안 쓰는 것이 중요했다. 내 여생을 함께할 황금 같은 3개의 패 중 하나를 쉽게 날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2020년 4월 23일 스텔라라로 첫 주사제 치료를 시작하던 당시의 내 모습





스텔라라를 사용하며 나빠지는 몸상태를 그저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버텼다. 일주일에 최소 5번은 자다가 복통으로 깼고, 깨어있을 땐 매일 설사를 10번 넘게 했다. 방귀와 설사를 구별할 수 없어서 방귀를 뀔 때도 화장실에 갔다. 나중엔 음식을 먹는 것도 힘들어 일주일에 세 번은 밥대신 내과에 가서 수액을 맞았다. 당시의 내게 음식을 먹고 소화시키는 행위는 마치 뾰족뾰족한 가시공을 삼키는 것과 같았다. 결국 1년 7개월 만인 2021년 11월 16일 스텔라라에서 휴미라 주사제로 약을 교체했다. 나는 이런 상황 속에서 인생 처음으로 서울에 가서 혼자 지내야겠다는 위험한 결심을 했던 것이다. 도대체 난 왜 이런 무모한 결심을 한 걸까.







나의 결심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대전보단 서울에 더 좋은 개발자 교육기관이 많았던 것도 있다. 코딩이 내 적성에 찰떡인 것도 한몫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혼자 지낼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이대로 집에서만 지내다간 평생 내가 뭘 할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른 체 끓는 물의 개구리처럼 크론병에게 서서히 죽임을 당할 것 같았다. 내 몸뚱아리 하나 정도는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이 든 순간 바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내게 필요한 건 두 가지였다. 내가 들어가고 싶은 코딩 교육기관에서 5월에 보는 테스트에 통과할 수 있는 코딩실력과 서울에서 혼자 지낼 수 있을 만한 건강상태였다. 이 두 가지를 메인 목표로 삼았다. 당시 난 공인중개사로 일하고 있었는데 일과 병행하며 이 목표들을 달성할 수 없을 거라 판단해 당장 일부터 그만뒀다. 그 후 탁월한 코딩 실력을 위해 고시생처럼 하루 종일 코딩 공부를 했다. 또한 빠른 건강회복을 위해 철저한 식단관리도 시작했다. 밀가루, 튀김, 붉은 고기, 탄산음료, 단 음식, 매운 음식, 가공식품 등 몸에 조금이라도 안 좋은 음식은 모조리 끊었다. 먹는 즐거움을 스스로 거세한 셈이었다.



건강을 위한 행동에 운동이 빠질 수는 없었다. 근육량과 체력을 늘리기 위한 근력운동과 유산소 운동도 규칙적으로 했다. 당시의 난 사마귀 냉동 치료를 3주에 한 번씩 3년 동안 받고 있었다. 크론병으로 인해 면역억제제를 먹고 있어서 그런지 사마귀 치료 속도가 매우 더뎠기 때문이다. 나의 발과 손 이곳저곳에는 항상 피물집이 잡혀 있었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는 생각으로 어떻게든 꾸역꾸역 운동을 했다. 내 목표는 서울에 올라가기 전까지 근육량을 늘려 나의 예전 체중인 66kg를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스텔라라를 사용하며 서서히 악화되던 체중이 휴미라를 사용하며 다시 좋아졌다





어떻게 이런 발로 운동을 하고 다녔는지 모르겠다





이런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염증수치는 좋아지지 않았다. 2022년 4월 19일 외래진료에서 확인한 나의 칼프로텍틴 수치는 3700이었다. 칼프로텍틴이란 대변 검사를 통해 장 내의 염증 상태를 알 수 있는 수치로 50 미만이어야 정상이다. 3700이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내가 괜히 밤마다 배가 아파서 깨는 게 아니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약효가 너무 더디다며 내게 주사제 투여량을 늘릴지 여유를 갖고 좀 더 지켜볼지 물으셨다. 나는 휴미라 주사를 맞으면 해당 부위가 4일 정도 두드러기처럼 올라오는 부작용을 겪고 있었지만 서울에 올라가기 전에 최대한 건강이 좋아지는 것이 목표였기에 여유 부릴 새가 없었다. 난 일말의 고민도 없이 투여량을 늘리겠다고 했다. 그렇게 2022년 4월부터 2주에 1번씩 맞던 주사를 매주 1번씩 맞게 되면서 나는 일주일 중 절반이 넘는 기간 동안 두드러기가 올라와있는 사람이 됐다.



염증수치를 빠르게 낮추기 위해 식단에도 변화를 줬다. 3끼 중 한 끼는 청소년 크론병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경장영양식을 먹기로 했다. 크론병 경장식에는 크게 '모노웰'과 '엘리멘탈' 두 종류가 있다. 이 중 난 '모노웰'을 먹기로 했다. 해외에서 만드는 '엘리멘탈'에 비해 구하기도 쉽고 가격도 더 저렴했기 때문이다. 저렴하다 해도 인터넷 최저가는 10포에 8만 원대다. 성인이 식사 대용으로 먹으려면 최소 두 포는 먹어야 하니 한 끼 식사에 무려 16,000원이 넘는 돈이 들어가는 것이다. 청소년 크론병 환자는 나라에서 경장식을 지원해 줬지만 성인은 아니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돈을 아끼기 위해 크론병 카페와 중고나라를 전전하며 발품을 팔았다.





서울 생활을 대비해 열심히 준비해 놨던 모노웰





이 모든 걸 하면서도 제일 열심히 한건 역시 코딩 공부였다.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코딩 실력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건강하지 못한 내가 회사에 믿음을 주기 위해선 누구보다도 탁월한 개발 실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있을 땐 항상 코딩 생각만 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코딩을 했으니 무의식 중에도 코딩 생각을 한 것 같다. 그 결과 2022년 5월 23일 코딩테스트에 무난히 통과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의 교육은 2022년 8월 8일부터 시작이었기에 그전에 들어갈 수 있는 방을 구하러 다녔다. 나는 식단 관리를 위해 자취방에서 밥을 먹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몸이 안 좋을 땐 중간중간 쉬어야 했으므로 학원에서 가까운 방을 찾아다녔다. 운 좋게도 학원과의 거리가 불과 100m 밖에 안되면서 7월 말에 입주도 가능한 방을 구할 수 있었다.



2022년 7월 25일 누구보다 자연을 좋아하던 나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도시화된 서울시 강남 한복판에서 인생 첫 자취를 시작했다. 당시 내 몸무게는 목표였던 66kg에 한참 모자라는 55kg였다. 칼프로텍틴 수치는 2600 정도로 3개월 전의 수치였던 3700에 비하면 좋아졌지만 정상수치인 50에는 택도 없었다. 나의 첫 자취는 시작부터 마치 피난민처럼 뭐 하나 제대로 준비된 것이 없었다. 뭐 어쩌겠는가. 2013년부터 크론병을 투병하면서 건강이라는 녀석은 한 번도 내 계획 아래에서 얌전히 굴었던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당시 29살이었던 나는 20대가 끝나기 전에 한 번쯤은 타 지역에서 혼자 크론병과 싸워보고 싶었다. 코딩 교육기관에서 만나는 열정 넘치는 사람들과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기대됐다. 앞으로 내게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궁금했다. 그렇게 나는 불안 조금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크론병과의 두근두근 첫 동거를 시작했다.



교육 시작 일주일 만이었던 2022년 8월 15일. 대한민국 국민에게 더없이 기쁜 그날. 난 건강문제로 교육 과정을 중도 하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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