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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문 Mar 06. 2024

사랑 VS 결벽증

2024.03.03.(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엄청나게 예민했다. 이 엄청난 예민함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병적 증상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결벽증이었다. 작년 연말 오랜만에 중학교 시절 친구들을 만났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친구 한 명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옛날에 지문이랑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 휴게실에 갔었거든? 내가 말을 하다가 지문이 얼굴에 내 침이 튀었는데 갑자기 얘가 "미친!"이라고 외치더니 후다닥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벅벅 닦고 오더라고. 그러고선 자기는 얼굴에 침 튀면 여드름이 나서 그렇게 행동했다고 했는데 난 이때 속으로 '내가 더럽나?' 생각하며 내가 잘못된 줄 알았어. 이 미친놈 때문에!"



가해자는 자기가 입힌 피해는 하나도 기억을 못 한다더니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중학교 시절 내가 얼굴에 침이 튀면 여드름이 생긴다고 생각했던 건 확실히 기억났기 때문에 친구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내 행동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상처가 됐으면 친구는 15년이나 지났음에도 그날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걸까. 어린 시절 사회성이 부족했던 대문자 T 지문이는 정말 미친놈이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서 동생에게 낮에 있었던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자 동생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ㅋㅋㅋㅋ 오빠 진짜 나빴었다 ㅋㅋㅋㅋ 근데 오빠 옛날에 내가 오빠방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도 내가 있던 자리를 바로 닦고 쓸고 아주 난리부르스를 췄어. 나도 그때 속으로 '내가 더럽나?' 생각하며 상처받은 게 기억나서 오빠 친구 마음이 너무 공감된다 ㅠㅠ"



오직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던 어린 시절의 순도 100% T 지문이는 사이코패스임이 분명했다. 괜히 학창 시절 친구들이 지문이는 크론병 걸린 뒤 사람 됐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이런 사이코패스 같은 놈을 아무도 손절하지 않았다니. 난 건강복은 없어도 인복 하나는 확실한 것 같다. 이렇게 지랄 맞던 나의 결벽증은 연애를 시작하며 우연한 계기로 한순간에 고쳐지게 된다.







2016년 겨울. 22년 7개월 동안 모태솔로였던 나는 대학교 과cc로 인생 첫 연애를 시작했다. 첫 연애는 내게 이제껏 느껴본 적 없던 강렬한 감정들을 선사했다. 그 감정들로 인해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떨어져 버린 나는 '공부는 홀로 외롭게 하는 것이다'라는 나의 원칙까지 어기며 여자친구와 처음으로 도서관에서 공부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역시나 내 예상대로 우리는 공부에 전혀 집중할 수 없었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당시 내게 공부 데이트에서 중요한 건 '공부'가 아니라 '데이트'였기 때문이다. 그저 도서관 휴게실에서 서로 손장난 발장난을 치며 꺄르륵거리는데 온 집중을 했다.



한참을 노는데 집중하니 우리는 저녁을 먹었음에도 배가 고팠다. 여자친구가 파리바게뜨에 있는 연유브레드가 먹고 싶다고 해서 산책 겸 같이 다녀오기로 했다. 우리는 빵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마실 것을 구매했다. 이때 당시 난 아직 결벽지문이었기에 빵을 깔끔하게 집어먹기 위한 나무젓가락도 야무지게 챙겨 왔다. 도서관 휴게실에 도착하자마자 난 화장실에 손을 씻으러 갔다. 손을 씻고 돌아오니 여자친구는 화장실에 다녀오지 않고 우리가 사 온 간식들을 꺼내놓고 있었다.



'뭐지? 나 먹기 편하라고 일부러 화장실도 미루고 내가 손 씻으러 간 사이에 먹을 준비를 다 해놓은 건가? 감동이당 ㅎㅎ'



나는 혼자 설레발을 치며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여자친구가 돌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여자친구는 연유브레드 포장지를 가차 없이 뜯으며 빵을 꺼내더니 씻지도 않은 더러운 손으로 직접 빵 한 조각을 부욱 뜯었다. 평소의 결벽지문이었다면 밥상을 뒤엎을 상황이었지만 사랑의 호르몬 때문에 뇌에 이상이 생겼던 나는 '여자친구가 엄청 배고팠구나'라고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나도 젓가락을 꺼내 먹을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여자친구는 아래와 같이 말하며 정신 나간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오빠! 내가 먹여줄게! 아~~~ 해봐 ㅎㅎ"



여자 친구의 손이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영화에서만 보던 슬로 모션이 펼쳐졌다.



'뭐지? 얘가 왜 이러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왜 내가 부탁하지도 않은 짓을 하지? 손에 세균이 얼마나 많은데. 크론병 때문에 면역억제제를 먹고 있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건가? 얘 스마트폰 화면도 엄청 더러웠는데... 손톱은 또 왜 저렇게 길지? 도대체 언제 깎은 거야???'



나는 여자 친구 손에 있는 수많은 세균들이 빵에 들러붙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미친 저 세균들 좀 봐. 하필 빵 표면에 연유가 덕지덕지 발라져 있어서 세균들도 더 잘 달라붙게 생겼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거절해야 하나? 우리 아직 사귄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날 이상한 놈으로 보면 어떡하지? 미치겠다 진짜'



어느덧 여자친구 손에 들린 빵은 내 입 근처에 와있었다. 사람은 절체절명 위기의 순간에 두뇌를 100% 쓰게 된다더니 정말로 내 사고 속도는 미친 듯이 빨라졌다. 말 그대로 두뇌 풀가동이었다.



'어릴 적부터 결벽증이 있었던 나는 크론병에 걸렸는데 이렇게 더럽게(?) 살아왔던 여자친구는 건강한 걸 보면 사실 적당히 더러운 걸 먹는 게 건강의 비결일지도 몰라. 맞아. 난 어린 시절부터 너무 깨끗한 것만 먹었어. 친구들이 즐겨 먹던 피카츄 돈가스에게 눈길도 안 줬었잖아. 나의 장에게 적당히 세균을 먹이며 혹독하게 키웠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온실 속의 화초로 만들어 버린 게 크론병의 원인이 된 것 같기도 해. 사실 결벽증을 유지하는 나도 힘들었잖아. 이게 얼마나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는 강박증인데. 결벽증을 계속 갖고 있다면 결국 얘랑은 끝이 있을 거야. 지금 잠깐 밖에서 드러나는 모습이 이러면 집에선 얼마나 더 하겠어. 나는 첫사랑과 결혼하는 게 목표잖아. 결벽증을 지금 포기하는 게 맞아'



나는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그 순간 결벽증과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공중화장실 변기에 화장지 깔고 변보기.

공중화장실의 모든 것을 손으로 직접 만지지 않기.

소변을 보기 전에도 손 씻고 보고 나서도 손 씻기.

얼굴에 침 튀면 벌떡 일어나서 바로 물로 닦고 오기.

새 학기가 시작하면 내가 사용할 책걸상 껌종이를 깨끗이 제거하고 물걸레로 벅벅 닦기.

교실 청소 시간에 누구보다 열심히 청소하기.

공공장소에서 버튼 누를 때 손등으로 누르기.

외출했다 들어오면 스마트폰 알코올로 소독하기.

숟가락 젓가락을 식탁에 그냥 올려놓지 말기.

캔 음료 마시기 전에 입구 닦기.

틈날 때마다 손 물로 깨끗이 닦기.

침대는 반드시 잠옷을 입었을 때만 들어가기.

과자를 먹을 땐 젓가락 사용하기.

컴퓨터 사용이 끝나면 키보드와 마우스를 알코올로 소독하기.

매일 내 방의 모든 가구들과 바닥을 물걸레질하기.

조금이라도 오염된 것 같은 음식은 아까워하지 말고 바로 버리기.



마침내 연유브레드 한 조각이 내 입으로 들어왔다. 조금은 과하게 들어와서 짭짤한 여자친구의 손가락까지 맛봐버렸다.



"내가 먹여주니까 더 맛있지?! 히히"

"응... 너무 맛있다...ㅠㅠ"







대학시절 정신건강이라는 교양 수업 교수님은 연애가 성장에 도움이 된다며 연애를 장려하셨었다. 교양 수업을 들을 당시의 나는 모태솔로라 교수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격하게 동의한다. 결벽증은 강박장애의 일종이다. 결벽증을 고치기 위해 정신과를 다니며 약물치료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나는 연애를 하며 상대방과 오래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쉽게 결벽증을 고칠 수 있었다.



나의 우려와 달리 결벽증을 포기해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스스로 만든 마음의 감옥에 나를 가두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결벽증을 내려놓자 마음이 여유로워지며 삶의 질이 올라갔다. 한발 더 나아가 둔감하고 여유로웠던 여자친구와 지내며 나는 모든 것을 쓸데없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주변 사람들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 후 나는 예민함을 다른 사람이나 나의 감정을 섬세하게 느낀다거나, 꼼꼼하게 일처리를 하는 등 긍정적인 방향으로 활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연애 덕분에 나의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성장을 한 것이었다.



당시엔 정말 당황스러웠지만 지금은 세균 가득한 빵을 손수 먹여줬던 여자친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그래도 외출하고 돌아오면 잊지 말고 손부터 닦아줬으면 좋겠다)







p.s.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여자친구가 먹여줬던 연유브레드는 정말 맛있었다. 이후에도 그날의 맛을 떠올리며 연유브레드를 사 먹었지만 그 맛이 안 났다. 여자친구의 짭짤한 손맛이 빠져서 그런 것 같다. 단짠단짠이 유행하는 이유를 알겠다.



p.s.2

지금은 결벽증이 많이 좋아져서 얼굴에 침 튄다고 옛날처럼 지랄 맞게 행동하진 않는다. 다만 잠들기 직전의 나는 하루 중 가장 깨끗한 상태이기에 청결에 예민해진다. 우리 커플은 잠들기 전에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데 가끔 여자친구가 삘 받으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야기를 하다가 침이 튈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잠옷 소매로 침을 슥슥 닦으며 여자친구에게 스위트하게 이야기한다.



"미안한데 천장 보고 말해줄래?"



그렇게 서로 천장을 바라보며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다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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