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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문 Feb 28. 2024

엄마의 밥풀

2024.02.22.(목)

오늘 아침 발바닥 사마귀 치료를 위해 대학 병원에 다녀왔다. 전공의들이 다 파업을 해서 그런지 진료가 많이 밀려 있었다. 오전 11시 예약이었는데 12시 30분이 돼서야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치료를 마치고 집에 도착하니 한시 반이었다. 평소에는 12시에 혼자 밥을 먹었는데 오늘은 병원에 다녀오느라 점심 식사 시간이 지체되어 엄마와 같이 밥을 먹게 됐다.



엄마와 동시에 점심을 먹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내가 먼저 먹고 있자 엄마는 식탁 맞은편 자리에 엄마의 밥을 차리며 앉았다. 나는 엄마의 식단을 보고 열이 올랐다. 내가 그렇게 단백질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엄마는 현미밥, 매운 멸치조림, 매운 쌈장, 매운 고추장을 놓고 먹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매운 놈을 매운 소스 1과 매운 소스 2에 찍어 먹는다니.



엄마의 얼굴을 향해 잔소리를 발사하려는 찰나 엄마의 얼굴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놀부 아내에게 밥주걱 싸대기 맞은 흥부마냥 엄마의 왼쪽 볼에 밥풀들이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직 숟가락을 들지도 않았었다. 또 밥을 푼 뒤에 밥주걱에 붙어있는 밥풀을 입으로 허겁지겁 떼먹은 게 분명했다. 엄마에게 밥풀 떼라고 말하려는 순간 엄마가 무대뽀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가 신혼 때 매일 듣던 라디오가 있거든? 12시 40분에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라고..."



젠장할. 도저히 집중이 안 된다. 엄마가 이야기를 시작하자 밥풀들이 EXID처럼 위아래로 춤을 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엄마의 격렬한 토크를 감당하지 못하고 떨어져 나갔다. 그런데 마지막 남은 한 녀석 심상치 않다. 달랑달랑거리는데 도저히 떨어질 기미가 안 보인다. 비행기에 매달린 톰 크루즈 같다. 엄마의 이야기가 소중한 글감이 될지도 모르기에 더 이상 이놈에게 관심을 줄 수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미안한데 처음부터 다시 말해줄래?"

"엄마가 신혼 때 매일 듣던 라디오 프로가 두 개 있거든? 12시 40분에 시작하는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랑 3시에 시작하는 이종환,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였어. 매일 이 시간만 기다리다가 깔깔대며 들었어. 신혼과 일상에서 생기는 웃긴 이야기들을 엄청 재밌게 소개해 줬거든. 그 이야기를 기억해 놨다가 아빠가 퇴근하면 해줬거든? 그럼 아빠가 "너는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냐? 이야기를 참 재밌게 잘 전달한다" 하면서 맨날 칭찬해 줬었어. 근데 어느 순간 사람들이 라디오를 안 듣고 사연도 없고 하니까 프로가 내려왔더라고. 이게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냐."



누가 우리 엄마 대문자 F 아니랄까 봐 입을 앙 다물며 속으로 울컥하는 게 다 보인다. 옆에 있던 밥풀도 같이 움찔한다. 나는 겨우 웃음을 참는다.



"아무튼 그 프로에서 웃긴 사연이 있었어.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애를 볼 수 없어서 시골에 있는 시어머니에게 맡겼대. 하루는 갔는데... 푸흡!"



아빠는 그 시절 엄마의 이야기가 재밌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나오기도 전에 혼자 터지는 엄마가 재밌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



"하루는 푸흡..! 하루는 갔는데. 이렇게 바닥 걸레질하는 걸로 푸흡..! 갑자기 애 코를.. 크헤핰핰캌캏... 벅벅 닦았... 아핳핰핰! 얼마나 웃기냐!"



빵 터지는 엄마를 보니 나도 빵 터졌다. 엄마의 이야기가 웃겨서. 엄마의 웃음소리가 좋아서. 엄마가 웃자 엄마 볼에서 파르르 떠는 밥풀이 어이가 없어서 나도 같이 웃었다.



"근데 걔가 하는 말이 더 웃겨 애가 집에 오자 엄마한테 머리를 "대갈빡!" 입을 "주둥빡!" 크아핰핰!"

"애가 그렇게 했다고 엄마한테?"

"할머니가 그렇게 가르쳐 준 거야. 단어를. 크흫흫. 그래갖고 애갘 단어르흥 쓴대에엨키캌. 왜 이렇게 웃기냐 이게"



엄마가 아무리 웃어도 도저히 떨어질 생각이 없는 비범한 밥풀을 나만 보기 아까웠다. 다른 사람에게도 즐거움을 주고 싶어 출근하는 엄마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엄마의 음악 학원에 상담하러 온 학부모가 있다는 전화가 왔다.



"헉! 지문아 엄마 빨리 가야겠다. 상담 오셨대."



엄마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기로 했다. 엄마는 거울도 안 보고 상담실에 들어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엄마를 개그우먼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쉬웠다.



"엄마 고백할 게 있어. 원래 안 말해주려 했는데 상담이니까 봐줄게. 엄마 왼쪽 볼에 밥풀 붙어있어. 떼고 가"

"너 이놈 자식 엄마를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왜 애들이 웃으면 기분 좋잖아 ㅋㅋㅋㅋ. 아무튼 밥풀 떼고 잘하고 와~"

"예쁜 엄마 잘하고 올게!"



엄마가 출근하자 외로운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엄마와의 즐거웠던 기억을 글로써 영원하도록 만든다.











p.s.

엄마의 정보는 신뢰성이 떨어져서 엄마가 들었다는 라디오 프로들의 시작시간을 직접 찾아봤다.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쇼>는 매일 낮 12시 20분부터 오후2시까지 했다.

<지금은 라디오 시대>는 매일 오후 4시 5분에서 저녁 6시에 했었다.

엄마가 알려준 시작 시간은 다 틀렸다.

역시 우리 엄마다.



p.s.2

엄마는 내가 빵 터진 게 엄마의 이야기가 엄청 웃겨서 그런 줄 알았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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