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키코모리 K선생 Nov 12. 2024

두 개의 지옥 그리고 나 (2/2)

동굴 속 이야기 스물일곱

35도는 날 미치게 만들고 내 인내력을 빠르게 바닥내는 미친 온도다. 이 정신 나갈 것 같은 더위가 지옥이란 것을 난 확신 했다. 적어도 냉동창고 알바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냉동창고에서 나오면 햇빛이 작렬하는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가 기다렸다. 그리고 그 위에 서면 혼란이 밀려왔다. 얼마간 시원했기 때문이다. 마치 온몸에 멘톨을 끼얹은 듯한 시원함이다. 상쾌한 바람이 몸을 빠짐없이 통과하는 감각이었다.


지옥같이 더위가 들끓는 아스팔트에서 잠시도 견디기 힘든 35도의 더위는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100%의 시원 상쾌함을 느낄 수 있는 최고로 기분 좋은 온도가 되어버렸다.  



따뜻한 공기와 차가운 옷의 촉감 속에서 끈적이지 않는 청량하고 시원한 땀이 흘렀다. 이해할 수 없지만 적어도 감각은 나에게 알려주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아스팔트 위에 서 있던 얼마간의 시간은 내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쾌적한 순간이었다고...


내가 혐오하는 더운 여름날이 쾌적해졌다. 이 기묘한 상쾌함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었다.

늦가을 새벽에 안개 자욱한 숲을 거니는 기분과 비견할만한 상쾌함이다




퇴근할 때는 31도였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기 전에는 숨이 막히는 온도로 느껴졌건만 이젠 '쌀쌀하네'란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흘러나왔다. 퇴근길에 1시간씩 걸을 땐 기분 좋은 따뜻함과 서늘함이 20분쯤 이어졌다. 더운 날이다. 땀도 난다. 그럼에도 난 싸늘한 가을을 걷는 듯했다. 시원한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상쾌함이 사라졌고 더위가 느껴졌다. 청랑하고 시원한 땀은 끈적한 땀으로 변했고 옷은 땀에 젖어갔다. 하지만 이전의 상쾌한 감각이 지속되는 듯했고 불쾌한 기분이 들진 않았다.

31도의 퇴근길은 가을을 걷는 감각이 되어버렸다.


여름과 더위는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다만, 나 혼자 시시때때로 불쾌함으로 괴로움으로 고통으로 상쾌함으로 이런저런 다른 반응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더위를 저주한다. 땀이 나고 끈적이기 때문이다. 끈적임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인내력이 발휘되질 않는다. 그래서 정말 좋아하는 운동과 취미생활을 제외하면 '땀 한 방울도 흘리지 말자'는 주의다. 이 감각과 취향은 내 평생의 생활습관, 선호, 계절별 활동반경, 취미, 옷차림 등 많은 것을 결정해 왔다.


하지만, 냉동창고에서 일을 시작한 지 불과 1주일 만에 수십 년 동안 날 견인해 온 더위와 땀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고작 1주일로 다른 감각, 다른 의견을 갖게 되었다.


지탱하는 많은 것들이 이렇게나 얕고 가벼웠던 걸까?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흔들흔들


추위도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냉동창고에서 25kg 박스와 씨름하면 시원한 땀이 흘렀다. 땀이 났지만 춥긴커녕 상쾌했다. 아스팔트 위에서 느꼈던 상쾌함과는 또 다른 상쾌함이 얼마간 몸을 씻어 내렸다. 


지옥 같은 양 극단의 환경에서 동일한 시원 상쾌함을 느낀다는 점이 더욱더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소리도 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냉동창고의 팬이 내는 소음에 고막을 다쳤다. 상한 내 고막은 끊임없이 큰 매미소리를 울려댔다. 사람의 목소리는 그대로 들렸지만 조용히 흐르는 수돗물 소리는 수백 마리의 매미들이 울어대는 끔찍이도 큰 소음으들리기 시작했.



뒤틀린 감각으로 접하는 이곳은 분명 계속 같은 자리에 있던 친숙한 세상이었건만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달라진 감각에 보이는 것, 느끼는 것 마저 점차 바뀌어갔다. 감각으로 접하는 세계와 실제 세계와의 괴리는 내가 어떤 의문을 갖게 만들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일까? 믿어도 괜찮은 걸까?

같은 세상이 아니다. 달라진 감각에 보이는 것 마저 바뀌어간다.




감각, 감정, 욕망, 가치관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것들을 나 자신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극단의 환경을 오가면서 내가 일생동안 전적으로 믿어왔던 이들은 놀랄 만큼 쉽게 변할 수 있고 날 속일 수 있으며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믿어온 감각, 선호도를 비롯해서 연찬해 왔다고 생각한 인성, 교양, 가치관 모두가 참 얄팍하게 느껴졌다. 


'나'라고 믿고 있던 그것들은 경험, 기억, 편향, 익숙함 그리고 주입된 생각들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듯했다. 날 견인했던 것은 이렇게나 얕디 얕은 이미지였던 걸까? 난 편의와 귀차니즘으로 설정한 조건반사에 이끌려 살아왔던 걸까?



난 사물의 진실한 모습에 관심이 없다. 진실한 자신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둘 다 나에겐 중요치 않다. '사실을 알고 진실을 살핀다고 성공해? 부자가 되고 명예를 틀어 쥘 수 있어? 무슨 쓸모지?'


그저 말초적인 것들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만족했다. 히키코모리가 되고 그 자리에서 10년간 머물러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즐겁게 살아가기에도 부족한 시간인데 굳이 심각할 이유가?




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이 내 삶의 원리였다.

행복은 성공에서 비롯된다는 믿음, 노력하면 성공을 구가할 수 있다는 믿음, 부를 추구하고 어떤 수준에 도달하면 그때부터 행복의 시간이 이어질 거란 믿음, 내면을 쌓아 올리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쌓아 올리는 것이 더 가치 있다는 믿음, 사회적인 위치와 명예 그리고 많은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믿음.


히키코모리에서 깨어난 가 원하는 삶의 모습은 이전의 내가 쌓아온 믿음과 닮지 않았다. 그래서 대안이 필요해졌다.  이런 때에 양 극단에 놓인 두 개의 지옥을 경험한 것은 행운이었다.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머릿속 이미지, 믿음을 한 번씩 들여다보는 것을 의미 있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더더욱 차근차근 짚어나갈 수 있게 만들었다. 


진실한 자신을 탐구하면서 내가 원하는 방향을 두드리고 확인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길로 나아가려면 버려두고 나아갈 필요가 있다




고단한 육체노동으로 조금씩 자라난다. 두 개의 지옥은 날 혼란으로 밀어 넣었지만 확실히 성장시켰다.


- 여름에 쓴 글을 몇 달 묵이다가 이제야 올립니다. 너무 오래 쉬었네요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