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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문목화씨 Jul 05. 2024

아파트의 높이에서 오는 두려움

누구나 높은 곳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대부분 물리적인 높이로 인해서 불안함을 느낄 것이다. 공황장애에 걸린 아내는 높은 공간에 대한 두려움의 정의가 남들과 다르다.


연애 시절부터 아내는 높은 공간을 좋아했다. 여행을 가게 되면 항상 높은 층의 방을 원했고, 설악산 울산바위 뷰가 나오는 숙소를 위해 서울에서 새벽 4시에 출발한 적도 있다.


우리의 신혼집은 월곡동에 있는 복도식 아파트 20층이었다. 복도에 창문이 없어 현관문을 열 때나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 밖을 보면 아찔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베란다에서의 뷰를 보면 그런 기분이 금세 사라진다. 언덕에 위치해 있고 단지 내 제일 앞동이어서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장면은 정말 시원했다. 내부순환로가 보이고 맞은편의 낮은 주택과 빌라들 그리고 천장산까지 파노라마로 이어졌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는 이런 뻥 뚫린 뷰에 반했었다. '베란다를 꾸며서 아내와 함께 맥주 먹으면 정말 좋겠네'라고 생각했었는데 나중에 집을 팔 때도 구경온 사람들 대부분 비슷한 얘기를 하면서 마음에 들어 했다.


높은 공간의 시원한 뷰를 좋아하는 아내는 하계동으로 이사 갔을 때도 비슷한 선택을 했다. 8층에 위치한 아파트는 정남향으로 채광이 좋았고 바로 앞에 어린이 놀이터가 위치해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백색소음으로 들리는 쾌적한 공간이었다.


이 쾌적한 공간이 두려움의 집으로 바뀐 것은 한순간이었다.


따뜻한 햇볕이 비치고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가득했던 작은 거실은 지나치게 시끄럽고 눈이 부신 공간으로 바뀌었다. 8층이라는 시원한 높이는 혹시라도 뛰어내릴 수도 있는 불안한 높이가 되어버렸다. 공황이 생기면서 아내는 자기도 모르게 베란다의 창문으로 뛰어내릴 것만 같다는 착각을 하면서 높은 공간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현실과 공황 상태 사이에서 혼란이 생기면 그럴 가능성도 있었기에 나도 아내도 너무 무서웠다. 다행히 다음 집은 아파트 1층이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금액대여서 다른 선택지가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 부부에게 행복과 안정감을 만들어준 금쪽같은 집이었다.


아파트 제일 끝 동에 있는 우리 집은 큰 방과 베란다에서 보이는 작은 정원도 있다.(실상은 아파트 뒤편 현관에 심어져 있는 나무와 풀이지만 사람들의 왕래가 적어 마치 우리 집의 작은 정원으로 느껴진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빗소리와 땅의 냄새가 너무 아름다웠다. 생활할 때도 너무 편리했다. 분리수거할 때나, 엘리베이터 기다릴 때도, 층간 소음에 있어서도 너무 쾌적했다. 그중에 가장 좋았던 점은 아내가 점점 안정되어 간다는 것이다. 낮은 공간에서 오는 안정감과 땅의 기운이 아내를 평화롭게 만들었다. 지금 집에 이사 오면서 축구나 다른 커뮤니티에 소속되어 다양한 활동들도 같이 하면서 원래의 모습으로 점차 돌아가고 있다.

이제는 높은 곳으로 이사 가지 못할 것 같다던 아내는 작년 오사카 여행에서 35층의 전망 좋은 방을 경험했다.(무려 5성급이다) 아름다운 석양을 보면서 "높은 곳도 나쁘지 않겠네"라고 말하는 아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너무 다행이었다.


이제 아내가 높은 공간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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