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영상 33도. 길고 긴 여름이다.
한 사내가 텅 빈 콘크리트 도로를 등지고, 어둡고 빽빽한 수림을 향해 앉아 있다. 참으로 이상한 풍경이다. 맨발로 흙을 딛고 있는 사내. 저 짙은 수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한 줌의 흙이 된 아버지를 곁에 두고 앉은 사내. '결국 흙이 되었다' 말하여도 사내는, 시뻘건 명자꽃과 같은 두 눈만 껌뻑일 뿐 결코 울지 않는다. 역류하는 인파人波에 깎이고 깎여 맨들맨들해진 큰 돌처럼 우두커니 서 있을 뿐 울지 않는다. 왜 울지 않는가. 그 모습이 꼭 아버지를 닮았구나.
길고 긴 밤 겨우 지나 홀로 남은 사내, 텅 빈 도로 등지고 앉아 어둡고 빽빽한 수림을 바라본다. 그 두 발 어린아이와 같이 신을 벗고 맨발로 혼자 앉아 있다. 흙을 디디며 앉아 있다. 그럼에도 그 뒷모습은 외로운 어른이라. 아무도 없는 곳 외따로 망연히 있는데 사내는 왜 울지 않는가. 그러나 돌연 어디로부터 오는지 모를 바람이 온 수림을 뒤흔든다. 그때에 온 나무가 사내를 대신하여 운다. 그때에 온 나무가 소년을 대신하여 운다. 그때에 온 나무가 작고 작은 남자아이를 위하여 운다. 그때에 아주 작고 어린 한 남자아이 그 작은 두 발 흙 속에 파묻고 가만가만 어깨를 들썩인다.
모두가, 모두가 흙이구나.
바람이 지나간 곳 저편으로부터 한 작은 여자아이 쪼르르 달려와 사내 옆에 앉는다.
사내는 명자꽃과 같은 붉은 두 눈 금세 거두고 작은 여자아이 일으켜 이제 집으로 가자, 말한다. 작은 여자아이 아무 말 없이 사내 따라 걷는다. 그 모습이 꼭 아버지를 닮았구나.
한 사내와 한 작은 여자아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온 산이 너울처럼 넘실대며 작별을 한다.
잘 가라, 잘 가거라. 우리 다시 만나자.
여든 해를 살고 떠난 나의 오랜 친구와 사랑하는, 그의 가족에게.
오늘의 곡은 Lo.Flynn의 Bon Voyage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