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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콩대 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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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예랑 Aug 23. 2024

이름

25. 영상 30도. 긴 여름이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 치고 있다.

  김은 지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내 맞은편 의자를 꺼내어 앉으며 며칠 전, 이름을 빼앗겼다고 했다. 근래에 이름 도둑으로 인해 거리가 흉흉하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으나 김이 이름을 빼앗긴 줄은 몰랐다. 김은 그날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한 모양인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김은 아침에 시계를 한 번 보고는 입에 약을 털어 넣고 있었는데 초인종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고 했다. 나는, 어느 소파에 맥없이 구겨져서는 벌어진 약봉지와 탁상시계를 번갈아 바라보는 김을 상상했다. 김이 소란스레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서둘러 나가 현관문을 여니 웬 낯 모르는 이가 김의 이름을 물었다고 한다. 그러고는 별안간에 이름을 빼앗아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김은 그렇게 이름을 빼앗겼다.

  이름 도둑은 으레 그런 식이었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 남의 이름을 빼앗아 가 버렸다. 김의 곁에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김의 부인의 말에 의하면 그때, 순식간에 이름을 빼앗긴 김은 돌연 혼이 빠진 사람마냥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한참을 있었다고 한다. 내가 김에게, 이름을 빼앗겼을 당시에 기분이 어땠느냐고 물으니, 김은 양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당시에는 목전이 캄캄하고 분별이 없어 순간, 어차피 너무 흔한 이름이니 잃어버려도 괜찮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으나, 다시금 생각해 보니 아무리 흔한 이름이라도 내 이름이라, 이대로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김은 별안간 정신을 번뜩 차리고는 급하게 일어나 아무 신이나 주워 신고 이름을 되찾기 위해 냅다 뛰기 시작했다. 어느새 현관으로부터 멀어져 이미 계단을 따라 줄행랑을 치는 낯선 이름 도둑을 따라 헐레벌떡 뛰기 시작했다. "저놈이 내 이름 뺏어 간다. 저놈 잡아라, 저놈 잡아라." 김은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뛰기 시작했다. 달음질치는 김의 발은 어찌나 빠르고 정신이 없는지 계단을 두세 칸씩 휘휘 날아 내려갔다. "이놈아, 내 이름 내놔라." 우렁찬 김의 목소리가 화통을 삶은 듯 벌겋게 쩌렁쩌렁 울렸다. 김은 도둑을 향해 손을 죽 뻗으며 전력을 다해 그 뒤를 쫓았다.


  김의 이름은 정말 평범했다. 김과 똑같은 이름은 세상에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김은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자랑스러워했다. 적어도 김에게만큼은 '김' 그것은 유일한 이름이었다. 길을 걷다 누군가 뒤에서 '김!' 하고 부르면 이상하게도 김은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인 줄 정확히 알고 뒤를 돌아보았다. 김에게 이름은 그런 것이었다. 병원에서 '김 씨' 하고 부르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간호사가 '김 씨, 들어오세요.'라고 하면 의심 없이 그 소리를 따라 들어갈 수 있는 것이 김의 이름이었다. 김의 지인들도 그러했다. 누군가 "'김'이 말이야."라고 말하면, 모두들 신호등에 불이 켜지듯 자신이 아는 '김'의 모습을 떠올렸다.

  김의 이름은 김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미래이자 상징이었다. 그것은 김과 세상의 모든 것을 연결하는 가장 간편하고도 완벽한 고리였다. 그것이 평범하든 아니든 그것은 상관없었다. 이름이 없다면 그 누구도 김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고, 누군가에게 김에 대해 아무리 장황하게 설명한들 김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 못했으며, 무엇보다도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에 그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마음의 거리가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김의 이름은 곧 김이었다.


  색이 바랜 메리야스를 입고 얇은 잠옷 바지를 펄럭이며 이름 도둑의 뒤를 쫓는 김의 모습을 상상하니 애처롭기가 그지없다. 김은 그때를 생각하면 금시라도 까무러칠마냥 얼굴이 희어졌다. 그때의 아찔함이 도통 가시질 않는 모양이다. 깊게 팬 미간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가만가만 쓸어 올리며 다시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 안돼 보였다.


  김이 말하길, 처음에는 도둑이 거의 손에 잡힐 듯하였다고 한다. 한 번에 두서너 계단을 펄쩍펄쩍 내달았다고 하니 그 발을 스스로도 주체 못 했을 것이다.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빨리 뛸 수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은 정말 열심히 뛰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뛰었다. 김은 도둑을 곧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곧 이름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름 도둑의 옷자락 끝이 손에 거의 잡힐 무렵, 김은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때에 어찌나 심하게 굴러 내렸는지 김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순간 정신을 잃었다고 한다. 김은 자신의 비명 소리가 아뜩히 멀어져 가는 것인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김은 정신을 도로 되찾고는 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저놈을 기필코 잡아야 한다. 하나 깊은 통증이 밀려왔다. 김은 몸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울긋불긋한 상처들이 단풍처럼 피어올랐다. 그것을 발견한 김은 별안간 더 큰 통증이 느껴져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나는, 한 손으로는 난간을 부여잡고 한 손으로는 메리야스를 끌어 올려 눈물을 훔치고 있는 남루하고 가여운 김의 모습을 상상했다.

  김은 그 당시 하도 몸이 괴로워 이름 도둑도 잊고는 상처를 어루만지며 머리를 쥐어뜯었다고 했다. 쥐어뜯던 머리도 아리아리해지고 김은 급기야 가슴팍을 두드려 대며 현관문을 열었던 자신을 무턱대고 원망하기 시작했다. 원한이다, 원한. 아까 문을 열지만 않았더라면 이름을 빼앗기지 않았을 것이야. 이름을 훔쳐 간 것은 이름 도둑이건만, 김은 자신의 애먼 가슴팍만 세차게 두드렸다. 김은 망연히 앉아 계단 복도에 난 작은 창을 바라보았다. 야속할 만치 시퍼런 세상이 창 안에 걸려 흔들리고 있다. 견딜 수 없는 열기가 쏟아지고, 송곳 같은 매미 소리가 귀를 찔렀다. 저 멀리서 아이들끼리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김은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할 뿐이었다. 김은 김이 미웠다. 그런 김이 돌연 정신을 차린 것은 저 복도 끝에서 난데없이 뛰어 오며 소리치는 김의 아내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저기 이름 도둑이 간다!


  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에 벼락이 치는 듯하여 자리에서 튀어 올라 다시 뛰기 시작했다. 창 끝에 매달려 고래고래 소리치는 김의 아내의 손끝을 따라 김은 죽을 둥 살 둥 야단을 내며 달렸다. 김이 재차 마음먹고 자리를 박차고 달리기 시작하자 그 두 번째 뜀박질이 과연 얼마나 대단한지 금세 이름 도둑의 뒤를 쫓을 수 있었다. 이름 도둑의 옷자락이 또다시 손끝에 거의 닿을 듯하자 김은 그것에서 큰 희망을 느꼈다. "이놈아!" 김은 마지막 힘을 다해 껑충껑충 뛰었다. 고놈, 닿을 둥 말 둥 닿을 둥 말 둥 영 잡히지 않는다. 찢어질 듯한 김의 거친 숨소리가 거리에 쇳덩이처럼 박힌다. "이놈아, 나 이제 죽는다. 이놈아." 그러나 김은 결국 다시 놓쳤다.


  김이 제아무리 뛰어도 김의 이름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김은 결국 진이 빠져 할 말을 완전히 잃은 채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김은 중한 형벌을 받으러 가는 사람처럼 흉측한 고통에 짓눌린 얼굴로 헌 신에 실려 집으로 돌아가며 우선 아내에게 나를 뭐라고 부르라고 해야 하나 고민을 했다. 머리가 복잡했다. 태시부터 지금까지 이름이란 것이 없던 때가 있었는가. 이제 사람들에게 나를 무어라 불러 달라고 해야 하나 김은 고민했다. 김이 김의 이름을 좋아하든 말든 김의 이름은 곧 김이었다. 그것을 빼앗겨 버렸으니, 김은 그저 할 말을 잃을 뿐이었다. 김은 길 잃은 사람처럼 벤치에 앉아 아무 이름이나 불러 보았다. 스스로를 박이라고도 불러 보고, 최라고도 불러 보았다. 그러나 어떤 이름도 어울리지 않았다.


  김의 아내는 완전히 너절한 모습으로 현관에 들어선 김을 보고는 이제는 김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안타까운 얼굴을 한 채, 더는 없는 사람처럼 자신의 곁을 흘러가는 김의 어깨를 조용히 다독였다. 그날 늦은 오후 내내 김의 아내는 김을 무어라 부를지 고심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저기' 하고 주저하며 부르거나, 김의 안색을 살피며 김과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리거나, 헛기침을 하거나 김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럴 때면 김은 소파에 눌어붙어서는 아내를 향해 맥없이 고개만 돌릴 뿐이었다. 별안간에 이름이 없어진 김은 혼란스러웠다.


  그날 밤 김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늦은 시간까지 홀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떤 안식도 어떤 평안도 없는 그저 덩어리지고 캄캄한 밤이었다. 김은 돌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김은 곧 소리 없이 일어섰다. 그러고는 무명의 삶을 결국 받아들인 것인지, 혹은 체념한 것인지 모를 얼굴로 맥없이 방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웠다. 김은 무거운 고요 속으로 홀로 가라앉으며 소리 없이 울고 또 울 뿐이었다. 사람이 모든 기억을 잃어도 자기 이름만은 잊지 않는다는데 나는 그 이름을 도둑맞았구나 하며 김은 울었다. 김은 안개 속을 헤매듯, 이미 도둑맞은,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이름을 계속 생각해 보려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그것은 혀끝에서만 맴돌 뿐 좀처럼 잡히지 않는 이름의 희미한 흔적은 김을 더욱 괴롭게 만들 뿐이었다. 김은 스스로가 너무나 안타까워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베갯잇에 얼굴을 깊이 파묻었다.


  이름을 잃어버린다면 과연 나는 누구인가. 김은 아내를 등지고 누운 채 오로지 그 생각에 휩싸여

소리 죽여 울다 겨우 잠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분명 오래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은 별안간 자리에서 총알처럼 튀어 올랐다. 방금 내가 들은 것이 초인종 소리인가. 필시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한밤중 우레처럼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 김은 벼락처럼 방밖으로 뛰어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나 현관문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김은 이미 꺼진 현관 등 아래에 한참을 선 채로 끝없이 캄캄한 집 앞 풍경을 바라보았다. 놀라 따라 나온 김의 아내가 김의 등 뒤에 그림자처럼 서서 "저기." 하고 불렀다. '저기'. 저 멀리, 며칠 전부터 고장 난 가로등 불빛만이 맥없이 깜빡거릴 뿐이었다. 김은 허망했다. 그리고 허망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이 이토록 허망한 것인가.

  그런데 그때 희미하게 깜빡이는 가로등 불빛 아래로 뛰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까마득하지만 분명 그놈이다. 김은 그 뒷모습을 보자마자 신도 신지 않은 채 현관을 나서서 또 뛰었다. 이름을 되찾기 위해 어둠 속을 뛰었다. 비틀거리면서도 뛰고 또 뛰었다. 무엇을 생각할 새도 없이 뛰었다. 깜빡이는 가로등의 희미한 불빛만이 그 캄캄한 밤, 김의 발밑을 듬성듬성 비추고 있었다. 감탕 같은 땀을 뚝뚝 떨어뜨리며 이를 윽물고 뛰던 김이 기어이 늘어질 대로 늘어진 얼굴로,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한껏 젖은 얼굴로, 이제는 거의 희미해 도무지 들리지 않을 만큼 사그라든 쉰 목소리로, "이것 봐요, 내 이름 좀 제발 돌려줘요."라고 안간힘을 다해 소리치자, 이름 도둑은 그제야 힐끗 뒤를 돌아보더니 썩은 물웅덩이를 보듯 김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바닥에 툭 던져 놓고 저 멀리 도망쳤다. 김은 물먹은 통목과 같은 두 다리를 질질 끌고는 그것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것은 작은 봉지였다. 그 봉지를 여니 그 안에 김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김은 그렇게 이름을 되찾았다. 김은 이름을 되찾는 순간 펄쩍 뛰며, 태초의 아담처럼 자신의 이름을 큰 소리로 외쳤다. 김은 그렇게 이름을 되찾았다.


  

 

  아마도 김이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 더 이상 이름을 도둑맞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잘 간직하고 있기에 내가 지금도 김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김은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진저리가 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또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언가 아찔한 감정을 느꼈는가 눈을 껌뻑 감았다가 떴다. 여간 고생을 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김에게 물었다. "그런데 별안간 이름을 왜 돌려줬대요?" "글쎄, 나야 모르지. 내가 죽을 둥 살 둥 쫓는 꼴이 가여웠나, 아니면 내 그악스러움에 아주 학을 뗐나 보네. 내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있나. 거참, 신기하지. 생각지도 못하게 뺏겼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찾았단 말이야." 김은 앉은 자리에서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아까 자리를 비운 아내를 찾는 모양이다. "어찌 되었든 이름을 되찾아서 다행이네요, 김." 김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만 보면 말이야,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단 말이야. 그런데 더 가만 보면 말이야, 같은 이름이 없어." 김은 생각만 하여도 골치가 아픈 듯 손바닥으로 이맛머리를 쓸어 올렸다. "만약에 이름을 잃어버리면 말이다, 어떻게 해서든 찾아야지. 그 이름이라는 거 별 게 아닌 게 아니거든." 김은 거듭 당부했다. "이름 잃어버리지 마라."


  간신히 이름을 되찾은 채 그토록 절절히 말하는 김의 얼굴 뒤로, 화장실을 다녀온 김의 아내가 "김!" 하고 부르며 손짓을 했다. 김은 아내의 목소리와 손짓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작별 인사를 했다. 김의 아내가 내게 손짓을 한다. "잘 가요. 김." 하고 작별 인사를 하는 나를 뒤로하고 김과 김의 아내는 문을 열고 나가 이내 사라졌다.



 



  


<이름>은 아주 짧고도 가벼운 이야기로,

2023년 <차예랑의, 글>의 첫 번째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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