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선과 꼬인 위치

by 눈물과 미소

우민은 경희에게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말한다. CCTV도 카드 내역과 통화 기록도 확인하지 않았느냐고,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몇천 년 동안 천동설을 믿어 왔는지 생각을 좀 해보라고 한다.


경희는 평행선 위에서 슬픔을 느낀다.


경희에게는 ‘알아차림’인 것을 우민은 ‘의심’이라 부른다. 우민이 ‘윽박지름’이라고 여길 수 없는 것만큼이나 경희에게는 ‘호소’가 아니다. 그날 없어졌다가 별안간 다시 돌아온 티백을, 보란 듯이 분리수거함에 들어 있는 그날과 동일한 크래커 봉지 쓰레기를, 가지런히 개어 놓은 빨래 위에 흩뿌려진 체모를 경희는 발견한다. 그때마다 일그러지는 경희의 눈빛을 우민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경희는 점차 말이 없어졌다. 몇 시간씩 아무에게서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 날들이 이어졌고, 평행선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그날 채집한 머리카락과 체모에 대한 DNA 검사 계획을 알리자 우민은 두 가지를 물었다. 하나는 검사 기관의 신뢰도였고, 다른 하나는 검사 비용이었다. 검사 기관이 신뢰할 만한지 의문이 든다며 먼저 잘 알아보라고 말하는 우민의 표정에서 경희는, 겉으로 드러난 태연함과 조소 이면의 불안을 읽었다.

다음날 우민은 모근이 남아 있어 DNA 검사가 가능한 머리카락에 대해서만 가격을 책정한다는 다른 기관을 권했다. 이미 수수료를 지불했다는 경희의 말에,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묻는 대신 우민은 경희가 지불해 버린 수수료의 가격을 물었다.


‘여자의 모근은 모두 문질러 지워지거나 가위로 잘라낸 상태야. 여자는 계획적이고 치밀해. 우리 가정을 파괴하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라고. CCTV에 찍히도록 엘리베이터를 탔을 리가 없겠지. 내가 원하는 건 딱 세 가지, 인정과 사과, 재발 방지 약속이야. 그냥 사실대로 말하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던 걸로 할 거야.’

DNA 검사를 의뢰하러 가는 대신 온 가족이 함께 크리스마스 케이크 키트를 사러 코스트코에 가자고 말하는 경희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일단 검사 결과가 나오면 그때 이야기해.’


우민은 잘라 말했다. 그 순간 싹둑 잘려 나간 것은, 단란한 가정에 대한 경희의 실낱같은 희망이기도 했다.

우민은 자신의 과오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없던 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고, 경제적 손실에 대한 호소가 경희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며, DNA 검사 결과로 우민의 부정을 확인할 수 없게 된 다음에 크리스마스 케이크 키트를 사러 가도 된다고 확신했다.


평행선은, 이제 꼬인 위치가 되었다.


우민에게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으므로, 경희는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야만 했다.

적지 않은 가격을 지불하고 미세하게 남아 있을지도 모를 유전자의 흔적을 찾아야 할까?

이 행위가 가져올 경제적 손실과 마음의 긴장, 허탈감, 그리고 안도의 한숨과 의기양양해진 표정들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경희의 헛수고야말로 치밀한 누군가가 기다리는 바가 아닐까?



약속 장소인 종로 3가의 카페로 향하는 대신, 경희는 메시지를 보냈다.


‘검사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수수료는 그냥 가지셔도 됩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좋은 소식인 줄로 생각하겠습니다. 수수료는 죄송하게 됐네요.’


경희는 휴대전화 전원을 차단했고, 단짝 친구와 만났던 장소가 떠올라 왕십리역에서 내려 우선은 국밥을 한 그릇 먹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온기를 얻은 경희는, 다음으로 서점 구석을 찾았다. 아무도 찾아올 수 없는 세상 밖 공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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