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자유

by 눈물과 미소



갈망하던 자유의 순간이 못지않은 고통을 수반할 것이라는 사실도 경희는 알고 있었다. 늘 그렇듯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또 다른 고통, 혹은 적어도 불안의 시작을 의미했다. 이를테면 아이들의 방황, 경제적 불안정, 혹은 직장 동료들의 눈빛과 같은 것들은 고통이 아닌 순간에는 적어도 불편의 모습으로 경희의 삶의 새로운 근간을 이룰 것이었다.


묵은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고통으로 갈아타는 것이 과연 더 용감하고 덜 어리석은 결정이 될 수 있을까,

경희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인생은 어차피 고난의 연속이기에 현명한 이들은 그저 '덜 고통스러운' 편을 택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순간순간 겪는 고통을 정량화할 수 없을뿐더러, 장기적으로 볼 때 어느 편이 덜한 고통에 해당하는지를 파악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개인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 다른 누군가의 고통의 초래를 의미하게 된다면, 선택은 더더욱 쉽지 않게 된다. 내 자식의 눈물이랴.


또한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은 고통으로 인지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보면 축복으로 드러나는 경우와, 뜻밖의 행운이 알고 보니 고통의 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아주 많은 일들에 대한 숙고인데, 문제는 생각의 기간이 꼭 명철한 인식과 훌륭한 선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사태에 대한 파악과 선택지의 득과 실을 명철하게 따져본들,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괴테가 노래했듯, 온갖 기쁨에 대해 분석하려 자세히 들여다볼 때에도 결국 보이는 것은 '음울하도록 짙은' 실체의 실상이 아니던가. 깊이 들여다보고 많이 생각한 결과는 내게 주어진 어떤 선택지도 마땅치 않으며, 우리의 지혜로는 삶의 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의 인식일 뿐이니까.


'저는 도저히 모르겠으니 가장 좋으신 뜻대로 알아서 해주세요.'라는 신실한 기도는 어쩌면 자포자기의 다른 이름이다.



알 수 없다 하여 마음이 내키는 대로 충동적 선택에 몸을 내어 맡길 만큼 우리가 어리석지는 않다.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을수록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구분을 시도해야 한다, 감정이 너무 요동칠 때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원하는 것?

...

원하지 않는 것?

나의 속옷과 누군가의 양말이 한데 섞인 빨래를 보는 것.

누군가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방문을 닫는 것.

누군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방문을 열기 전 인기척을 살피는 것.

마주치기 전 황급히 밥을 차려 먹는 것.

그러기 전 속히 출근 준비를 마치는 것.

집 문을 열기 전 서성이는 것.

또다시 방으로 피하는 것.

매일 그렇게 사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자유인가 보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는,




그냥 참지 말고 헤어져라,

지난번 뒷산에서 어머니는 분명히 진심이었을 것이다. 네가 좀 참으라던 오늘의 뒷산에서 어머니의 말도 진심이었다.


양배추가 위장에 좋다니까 많이 먹어라,

어머니는 딸이 자유함으로 덜 고통스러워지기를 바라지는 못하므로 고통을 견딜 위장을 한상 가득 준비하였다.


타인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자유는 아닌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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