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함과 치밀하지 않음

by 눈물과 미소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저녁 식사 자리에서 타인의 험담을 종종 하는 순간을 경희는 불편해했다. 타인의 허물과 과오를 들추어 안주거리로 삼는 것은 뭐랄까, 매번 찝찌름한 뒷맛을 남겼다. 그리고 경희는 험담을 하지 않는 어른이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자랐다.

하지만 지금은 글을 통해 험담이라도 실컷 해야겠는 순간이었다. 뛰어내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직장에서 허구한 날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집까지 안전하지 않은 공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경희에게 가정은 더 이상 하루의 피로를 내려놓고 육체와 정신의 쉼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어느 가정도 관념이 아닌 현실 세계에서는 완전히 이상적일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장 친밀하면서도 가장 차갑고, 가장 따뜻하면서도 가장 날것의 근원적인 고통을 주고받는 곳이 우리들의 가정이 아니던가.

그러면서도 다시 돌아가고 싶어지는 마음의 안식처가 가정일진대, 그러한 곳을 경희는 잃어버렸다.

그것이, 경희가 글이라도 써야 하는 이유였다.






치밀한 누군가가 경희의 가정에 들어와 머리카락과 체모의 모근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흔적을 지웠으며, 동시에 주도면밀하게 자신의 흔적을 남겼다. 누군가 남긴 흔적의 공통점은 놀랍게도 대체로 경희의 직장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었는데, 각 흔적은 다음과 같다.


1. 경희의 직장 서랍에 들어 있다가 별안간 없어졌던 것과 동일한, 녹슬고 뒤틀어진 실핀이 현관에 떨어져 있었다.

2. ‘항산화 잘될 거예요. 파이팅’이라고 적힌 메모를 누군가가 가만히 떼어 수저통 아래에 숨겨두었다. 우민이 감기가 심하게 걸렸다는 소식에 함께 속상해하며 직장 동료가 건넨 마음이 고마워 경희가 주방 벽에 붙여두었던 메모였다.

3. 또한 화장실과 안방 화장대에 이리저리 비치해 두고 사용하던 라벤더 오일 세 병이 그날 모두 사라졌다. 샤워 후 속옷에 한 방울 떨어뜨리면 여성 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고 설명하며, 경희가 같은 사무실의 동료들에게 권할 뿐만 아니라 사다 주기도 했던 그 오일이었다.

4. 그런가 하면 치밀한 누군가는 경희의 허영심을 자극하던, 이국적인 정취가 가득한 티백 두 개를 가져갔다. 경희의 직장 동료가 선물해 준 것이었고, 가정의 평화를 기원하며 목사와 전도사가 방문했을 때, 잠시 망설였으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접하고 남아 있던 것이다. 티백이 없어졌다가 시일이 지나 그중 한 개가 다시 돌아왔을 때, 티백은 경희가 보관해 두던 칸이 아닌 다른 벽면에 들어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괜한 사람을 의심하고 몰아붙이는 것이야말로 이혼 사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1. 경희가 소지하고 있던 다른 실핀을 경희 혹은 자녀가 떨어뜨렸는데 떨어지는 소리를 못 들었을뿐더러 하얀 현관의 검은색 실핀을 며칠 혹은 그 이상 발견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2-1. 메모는 자연적으로 떨어졌다면 있을 수 없는 위치에 들어있었다. 따라서 손님을 맞이하거나 혹은 그저 부엌을 청소하기 위해 우민이 떼어냈을 가능성이 있다.

3-1. 라벤더 오일이 발이 달렸을 가능성, 혹은 경희가 라벤더 오일을 치운 후에 전혀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 혹은 라벤더 오일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다.

4-1. 마찬가지로 경희의 작업 기억에 상당한 문제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 정말 문제는 경희에게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경희가 기억력과 관찰력에 문제가 있는 상태가 아닌 경우, 이 모든 일들은 경희에게 대단히 위협적인 신호였다. 확인이 필요했다.



공작용 풀로 메모를 원래의 자리에 다시 갖다 붙인 후, 경희는 막 퇴근한 우민에게 질문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메모의 위치는 왜 옮겼어?



그런 메모가 거기에 있는 줄도 몰랐다고 말하는 우민의 눈동자가 커졌다. 예상했던 것보다 진솔한 반응에 경희는 차라리 우민이 측은하게 여겨질 정도였다.


'위치는 변함없고, 그 여자가 왔을 때 떨어졌던 걸 내가 붙인 거야. 거짓말 좀 그만하고 제발 사실대로 말해.'


우민은 잡아떼기로도 부족했던지 이제는 아이에게까지 메모를 만졌는지 묻기 시작했다. 경희는 진정되지 않고 갑갑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집 밖으로 나갔고, 한참을 걸었다.


'지훈이가 다시 붙여놨대,'

현관에 들어서는 경희에게 말하는 우민의 목소리는 뭐랄까, 애절했다.


‘메모는 엄마가 다시 붙여놨어. 너까지 왜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니.’

경희는 울부짖었다.


‘저는 떼었다고 말했어요. 거짓말 아니고 진짜예요. 정말로 떼어낸 적 있단 말이에요.’

아이도 울음을 터뜨렸다.


‘어머나, 그랬구나. 우리 지훈이가 예전에 메모를 떼었던 적이 있던 걸 말한 거구나. 엄마는 며칠 전에 떨어진 메모를 다시 붙인 걸 말한 거였어. 거짓말했다고 다그쳐서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우민이 메모를 떼어냈을 리가 없다는 것을 경희는 알고 있었다. 제발 거짓말을 멈춰 달라는 경희의 호소는 또 다른 허탈과 절망을 낳았다.




여자가 라벤더 오일을 가방 안주머니에 챙겨 넣고, 땅콩버터가 찬장에 있으니 환불해도 될 거라고 알리며 시간을 버는 동안, 땅콩샌드 재료를 구입했다가 다시 일부를 환불한 후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돌아왔을 우민의 모습을 상상하며 경희는 생각했다. 우민은 매사 악의는 없었다. 여자와 달리 그저 치밀하지 못했을 뿐.



치밀한 누군가와 치밀하지 않은 누군가로 인해 가정이 안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희의 정신세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어떤 공간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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