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preparation
6. 할수있어, 엄마니까
'엄마는 위대하다'는 글귀를 간혹 본 적이 있었다. 역사책이나 소설책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서 어머니의 위대함을 눈으로 본 적은 꽤나 있었다. 나는 내가 위대하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콧방귀를 뀌겠지만 그 당시에 내 아픔은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던 것은 사실이었다.
아기를 근처 가장 가까운 3차병원으로 남편과 의사선생님이 응급차를 타고 이동한다고 했고 병실에 홀로 남겨진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기도 뿐이라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기도했었다.
아기를 지켜달라고. 내가 대신 아프겠다고.
한참 지난 후 남편은 조금은 밝은 얼굴을 하고 들어와 이 것 저것 설명해주었다. 아기는 신생아중환자실로 들어갔고 검사를 했고 호흡기를 달고 현재 인큐베이터에 있다고 했다. 걱정말라며, 울고 있는 나를 달랬다. 내가 수술실에 있는 동안, 아기와 응급차를 타고 가는 동안, 아기 병원 수속을 밟는 동안 전부 나의 남편은 모든 순간을 마음 졸이며 두려웠겠구나. 아픈 배를 참고 남편을 끌어당겨 꽉 안았다. 고맙고, 미안하다고 생각하면서.
잘 이겨내보자고 말했다.
새벽이 밝았다. 새벽부터 나는 일어나 걸었다. 꽤나 통증이 있었지만 걷고 싶었다. 남편의 부축을 받고 링거를 꽂은 채 병실을 아주 천천히 걸어다녔다. 오후부터는 복도를 걸어다녔다. 얼른 회복하고 싶었다. 얼른 회복하고 아기를 보러가야했다. 같은 층에는 신생아실이 있었고 코로나 시국이라 정해진 시간에만 아기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복도를 걷다보니 하나, 둘 산모와 보호자 분들이 복도로 나오기 시작했다. 아기를 보는 시간이었나보다. 남편은 내 손을 잡고 조심스레 병실로 데리고 갔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함께 병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돌로 심장을 누른다면 이 느낌이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재밌는 예능이 뭐가 있는지 찾아보며 애써 미소지었다. 남편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 복댕이, 잘 이겨내고 있을거야'
'-님 아기 보호자 맞으시죠? 이대 목동병원 신생아중환자실 입니다. 아기가 호흡이 아직 가쁜 상태라 기도삽관을 진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바로 진행할 수 있도록 유선 상 보호자 허가 확인 부탁 드립니다.' 이튿날, 새벽, 우린 심장이 내려앉는 전화를 받으며 일어났다. 아기의 상태가 호전되지 못하는 듯 했다. 귓가에 맴도는 청색증, 황달, 호흡곤란 등의 단어들이 우리를 괴롭혔다.
그날도 나는 이를 악 물고 걸었다. 생각보다 걷는 것이 쉽지 않았고 처음에 일어날 땐, 장기가 쏟아지나 싶은 느낌을 받았다. 간호사님은 빨리 걷는 연습을 하는 것이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말씀 주셨다. 무리는 하지말라고 하셨지만, 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회복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많이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4일 차에 신생아중환자실에서 혹시 초유가 나오면 전달을 해달라고 하셨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안도감 아닌 안도감을 안고 초유를 어떻게 뽑아내야 하는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앞 뒤 옆으로 둥글게~ 둥글게~ 돌리면-' 남편은 유툽을 보며 마사지 손동작을 허공에 휘두르며 연습하고는 바로 실전으로 들어갔다.
'끄아아아아아아ㅏㄱ악'
겨드랑이부터 가슴부위까지 점점 단단해지는데 유툽의 의사, 전문자 분들의 마사지 방법을 열심히 공부한 우리는 실행에 옮기기에 한참이었다. 하지만, 이 얼마나.... 웃기고 아프고 부끄럽고 해괴한가. 남편은 마사지 영상을 보여 내 가슴을 아주 자동차 핸들 돌리듯(전지적 나의 시점)했고 너무 웃겨서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고통은 정말 정말 정말, 너무 아팠다. 가슴이 좀 부드러워졌나 싶을 때, 우린 산부인과에서 준 유축기로 열심히 초유를 받았다. 한시간 반이 넘는 노력과 고통으로 얻어 낸 초유는 고작, 몇 방울이 전부였다.
'아기에게 전해줘야하는데..' 애처로운 몇 방울의 초유를 담고서 허탈한 마음으로 젖병을 바라보았다. 요 근래 낙심말고는 느낀 감정이 없는 것 같지만, 나오지 않는 모유에 또 낙심했다.
하, 난 정말 왜 모유도 나와주지 않는걸까.. 난 왜 이러는 걸까.
그렇게 4박5일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끝내, 나는 혼자 산후조리원에 들어왔다. 아기 없이 들어온 나는 사실, 갈 곳이 없었다. 아기랑 함께 맞이하려 준비해둔 집안 곳곳의 아기용품, 아기물건과 열심히 먹으려고 준비해 둔 미역들이 있는 집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친정은 해외에 있기 때문에 엄마아빠집으로 도망 아닌 도망을 갈 곳도 없었고 내 몸을 스스로 조리할 힘도 기운도 없었다.
'오오, 쭉쭉 나온다!'
산후조리원에 들어가 오케타니마사지를 받기 시작하면서 초유가 잘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 오늘 바로 가져다 주자 여보' 출산 5일 째, 초유가 돌기 시작했다. 모든 시간은 가슴 마사지와 초유 생산에 힘썼다. 매일 매일 남편은 초유를 얼음팩 사이에 넣고 배달을 갔다. 초유를 배달하러 가는 남편은 훨씬 생기가 도는 듯 했다. 아기에게 무엇이라도 줄 수 있는 것이 생겼다는 마음 때문인 것 같았다. 초유를 준 이후, 하루하루가 다르게 아기가 호전되고 있음을 들으며 나와 남편은 그제야 숨이 쉬어지는 듯 했다.
그렇게 12일이 지나고, 우리는 아기를 만났다. 너무 보고 싶었고 너무 안아 보고 싶었던 우리 아기, 남편과 나는 그 날 속싸개 속에 얌전히 자고 있는 아기를 처음 품에 안았다.
고생했어, 아기야
고생했어, 우리
<오늘의 식탁> 된장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