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온 손님, 멀어지지 않는 마음의 거리

2000km를 건너온 그녀가 남겨 놓고 간 온도

by 박주영
너무 죽기 살기로 하지 마. ‘심심하니 일이나 하지’ 하는 마음으로 하자.
가벼움은 불성실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게 해 주는 기술이더라.
한 번 더 자고, 한 번 덜 증명하고, 한 번 더 네 쪽으로 기울어져도 괜찮아.


지난주, 먼 길 끝에 도착한 손님을 맞았다.

의리는 때로 남성보다 여성이 더 단단하다는 걸, 나는 이 친구를 통해 다시 배웠다.


중국으로 옮긴 뒤 “꼭 보러 갈게”라는 말은 많이 들었다.

하지만 각자의 삶은 무겁다.

직장과 가정이라는 궤도에서 잠깐 벗어나 비행기를 타는 일은 생각보다 큰 결심을 요구한다.

그래서 나는 대개 학교와 교수 아파트 사이를 오가며, 연구·강의·논문·독서·글쓰기의 고요한 루틴 속에 머문다.

혼자의 집중이 내게는 안정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왔다.

의대 졸업 후 석·박사를 통과해 이제 막 박사 취득을 앞둔 30대 초반의 의사, 네 살 아이의 엄마.

2000km를 날아와 1박 2일, 오로지 나를 만나러.

우리의 인연은 내가 중국에 와서 처음 몸담았던 의대에서 시작됐다.

나는 교수로, 그녀는 박사과정생으로.

거기서 우리는 같은 상처를 겪었다. 괴롭힘과 성과 착취, 보기 싫은 비리들.

결국 우리는 함께 그곳을 떠났고, 각자의 새 자리에서 더 잘 자랐다.

“함께 버텨 떠난 경험”이 우리 사이를 전우처럼 묶어 주었다.


오랜만의 외식이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백화점 식당가의 현지 맛집으로 갔다.

연구로 하얗게 타버린 표정이 첫 숟가락에 스르르 풀렸다.

우리는 오래전의 겨울을 꺼내어 데웠다.

암묵적으로 서로에게 빚지고 있던 위로의 말들이 조용히 오갔다.


“총장님이 직접 면접 보셨다고요? 90도로 인사하시며 환영했다니… 교수님, 이직 정말 성공적이었네요.”
“네가 박사 합격 통보 받았다는 소식, 그게 내겐 더 기쁜걸.”


그녀는 웃었지만 금세 표정이 흐려졌다.
“사실… 남편이 엄마에게 모든 걸 상의해요. 사소한 갈등도요. 가끔은… 너무 지쳐요.”
그리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연구는 더 복잡해요. 논문이 게재되면 행복했는데, 성과를 타인이 슬쩍 가져갈 때마다 내가 작아져요. 내가 한 걸 ‘내 것’이라 말하기도 조심스러워지고… 이제 뭘 붙들고 살아야 할지 헷갈려요.”


나는 잠깐, 예전의 나를 보았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의 어느 겨울—치열함으로만 나를 증명하던 시절. 그래서 말했다.

“너무 죽기 살기로 하지 마. ‘심심하니 일이나 하지’ 하는 마음으로 하자.
가벼움은 불성실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게 해 주는 기술이더라.
한 번 더 자고, 한 번 덜 증명하고, 한 번 더 네 쪽으로 기울어져도 괜찮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할게요. 돌아가서 새 출발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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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선물을 교환했다.

나는 이곳의 특산물을, 그녀는 고향의 기운을 담아 왔다.

명절이면 빠뜨리지 않던 그녀의 안부 메시지, 스승의 날에 보내온 꽃, “교수님”이라 부르는 존칭.

나는 특별히 챙겨준 게 거의 없는데도, 그녀는 내 곁을 놓지 않았다.

사람 사이의 온기는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잊지 않는 마음에서 오나 보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다시 캠퍼스로 돌아왔다. 한겨울의 공기가 맑았다.

걷다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각자의 궤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짜 인연은 거리가 아니라 방향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의 진심이, 먼 길을 건너와 하루를 통째로 데워 준다.


그녀가 돌아간 다음 날,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다시 논문을 열었다.
외롭지 않아서가 아니라, 외로움을 버틸 언어와 사람이 있어서였다.

긴 겨울을 지나오며 알았다. 인생의 길은 결국 “사람의 힘”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질문은 사람을 부르고, 답은 신뢰를 만든다.

그리고 밥 한 끼는 사람의 체온을 돌린다.


삶은 결과로만 서 있지 않는다.
우리를 앞으로 미는 건 성취의 숫자라기보다, 함께 나눈 시간의 결이다.

언젠가 이 기록을 다시 펼치면, 2000km를 건너온 그녀가 남겨 놓고 간 온도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끝으로, 당신에게도 조용히 묻고 싶다.

너무 무거워진 자리에 가벼움을 허락한다면, 오늘 무엇을 내려놓겠습니까?

오래 버티는 힘을 위해, 이번 주 당신이 스스로에게 건네줄 가장 작은 호의는 무엇인가요?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겨울의 중심에서, 우리 각자의 온도를 서로에게 조금씩 건네며 봄으로 걸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