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입원한 남편을 데리고 장애인 치과를 방문했다. 이가 몇 개 빠진 남편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좀 더 잘 먹을 수 있도록 임플란트 수술을 했었다. 그러나, 남편은 자신의 상태를 피력할 수 없으므로 이가 불편한지, 잘 맞물리는지 상태가 어떤지를 자세히 말해줄 수 없어 확인차 내원했다. 남편의 이는 아직 하나가 비어 있다. 그러나 임플란트를 하기 위해서는 전신마취를 감행해야 하는 뇌 손상 환자다. 치료에 협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의 말을 빌리자면, 인지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정상적으로 치료’하기보다 ‘불편하지 않도록 치료’를 하는 것에 그 방향을 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생각을 바꿔 임플란트는 시도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예전보다 치열이 비뚤어진다는 느낌이 들어 불안하지만, 어찌 되든 씹는 기능에는 이상이 없다고 한다.
일주일에 한 번씩, 차로 7분이 걸리는 요양병원에 남편을 보러 간다. 이 ‘면회’가 언제까지 이루어질지 알 수가 없다. 암을 제거하는 수술은 20일 이내로 좁혀져 왔고, 딸이 등교한 후의 텅 빈 집은 나를 더더욱 외로움에 빠져들게 했다. 내가 그렇듯, 남편도 그러지 않을까? 그러나 마주한 남편은 여전히 즐거운 듯 웃고 있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어리둥절해한다. 무엇 때문에 본인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지조차 다 잊어버리게 만든 빌어먹을 2019년의 그 사고.
그렇구나.
여전히 추억에 갇혀 기억에 매달리는 건 나 뿐이구나.
당신과 나는 더 이상 ‘우리’를 공유할 수 없는 사이구나.
마음이 저릿해지며 급격한 상실감이 몰려왔다.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아져 환히 웃는 남편을 바라보고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입원 전날에도 남편의 얼굴을 담아두기 위해 요양병원으로 향했다. 남편은 해사하게 웃으며 맞이했고, 여전히 내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알지 못한 채 일을 잘 다녀오라고 한다.
"응. 일 잘 다녀올게."
그것은 나에게 하는 다짐인 걸까. 나 잘 다녀와야 하는데 말이다. 알 수 없는 미래로 향하는 목표는 어둡고 불안하기만 하다. 도대체 우리의 내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는 하느님을 믿는 자로써,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역경 속에서도 그분이 뜻한 길이 있으리라 믿고, 치우치지 않고, 단 한 번도 탓하지 않고 걸어왔다. 그러나 나 역시 나약한 인간이기에 시련이 닥칠 때마다 무너져 내리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렇게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는 신부님과 면담하며 답을 찾으려 한다.
"너는 아직도 네가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아니요. 그렇지 않은데요.
"왜 힘들다고 말하지 않니."
-힘들긴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인데요.
"모든 걸 다 내려놓으면 그분이 끌어주실 부분이 있단다."
-전 내려놓을 수 없는걸요.
남편을 살리기 위한 목표 하나만을 보고 쉼없이 달려 온 나는,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향해 발을 떼는 것만 같다.
나는 쓰러지지 않았다고.
나는 아직 약하지 않다고.
그러니 나는 나를 위해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고.
내 남편이 회복해야할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되뇌이며 나에게 부여된 '환자'라는 이름을 밀어내기 위해 필사적이다.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무겁지만, 아직도 들어낼 힘이 있어서 이렇게 질질 끌고 가고 있다. 예수님이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면서 몇 번이고 쓰러져 누군가가 대신 십자가를 지는 것을 허락하셨던 내려놓음이 아직도 나에게는 없는 것일까.
나는 믿음이 모자란 것일까.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