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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k Lee Speaking Sep 08. 2024

줄 위에서 아슬아슬 춤추는 부처

두더지가 올라오는 걸 봤다면, 자유로워질 수도

장거리를 달리다 보면 늘 비슷하던 생각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하며 새로운 관점을 획득할 때가 있다. 오랜 시간을 꾸준히 달리거나 자연 속을 홀로 산책하기, 혹은 새로운 장소를 여행하는 것이 신선한 관점을 주는 까닭은 이들이 가진 공통점, 자의식의 경계가 느슨해진다는 점에 기인하는 듯하다. 이런 순간들은 Ego가 수다스럽게 떠들기를 멈출 때 고요한 적막 속에서 찾아온다. '생각'은 언제나 계산하느라 바쁘고 수다스러울 뿐 새로운 것을 내어놓지 못한다. 반면에 생각이 가라앉은 고요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사유'는 우리가 내면의 원천에서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는 과정이다. 자의식이 희미해질 때 자의식에 포획당해 있던 주의력은 비로소 자유로워지며, 가벼워진 주의력이 내부를 향할 때 명상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이 상태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내면에 지니고 있는 창조의 샘, 삶의 경험 속에서 느꼈던 감정과 획득했던 관점들이 자유롭게 뒤섞이고 있는 용광로에 접근하게 된다(엄밀히 말하면 그것에 접근한다기보다는 그 샘에서 무언가 불쑥 튀어나오고, 나는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하듯이 그 아이디어를 낚아채려 시도할 뿐이다). 그곳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 외에도 다양한 것들이 불쑥 튀어나온다. '생각'이 가득한 평상시에는 가려져 보이지 않던 것, 나의 무의식이 주는 감정들이다. 흙탕물에서 모래가 잠잠히 가라앉고 나면 비로소 보이는 바닥이다. 육체적 고됨이 자의식의 삼엄한 경계를 느슨하게 풀어헤치면, 그 틈을 놓칠세라 올라오는 이 세계야말로 나의 꿈을 형성하고 나의 생각과 가치관이 창조되는 곳이다.  


달리다 보면 숨이 차오른다. 고비를 넘기고 나면 호흡이 트인다. 그다음에는 다리에 신호가 온다. 육체적인 고난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온갖 '생각'들이 치고 올라온다. 이 생각들은 주로 합리화의 형태를 띤다. '지금 더 뛰다가 부상을 입으면 안 되니까 이쯤에서 멈추자',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뛰자.' 그것은 육체적 고난에 기인하는 합리화는 아닌가? 나의 경우에는 합리화인 경우가 많았고, 막상 집에 가서 해야 할 일을 정말로 했던 적은 별로 없었다. 단순히 힘들기에 멈추고 싶을 뿐이지만, 머릿속의 자의식은 이러저러한, 그러나 굉장히 그럴싸한 핑계를 들어가며 멈추는 것을 당연하고 마땅한 것으로 포장하려 한다. 


자기 내면의 솔직한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것은 들리지 않는 소리이며 읽을 수 없는 문자이기에 오로지 미묘한 느낌으로 인식하는 수밖에 없다. 너무도 미묘하기에 이 소리는 시끄러운 '합리화의 소리', '생각의 소리'에 자주 묻혀버리곤 한다. 내면의 소리를 느끼는 것은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첫 발걸음이다.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늘 '합리화된 생각', 다시 말해 사회에 의해 빚어진 관습적인 생각, 혹은 자신의 과거에 의해 조건 지어진 습관의 틀에 갇힌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이는 자유와 거리가 먼 삶이다. 자신의 다음에 뱉을 말과 행할 행동이 온전히 자신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자유이며, 선택할 수 없는 삶은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그만 달리고 싶다는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인 순간에, 당신은 그 자리에서 멈출지(적어도 자신이 합리화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에 멈추는 것은 '선택'에 속한다. 뒤따르는 책임을 감내하기로 결심한 것이기 때문에), 혹은 마구 올라오는 온갖 상념들을 뿌리치고 목표 지점까지 달릴지 선택할 수 있으며, 그렇게 매 순간 멈출지, 내딛을지 선택하며 내딛는 발걸음은 자유롭다.


그런데 만약 계속해서 달렸다면, 그 이유를 묻고 싶다. 멈추려는 솔직한 마음을 부정한 채 합리화된 생각으로 포장하려는 나약함을 단죄하고 자신을 단련하기 위한 고행의 일환인가? 자신이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함인가? 이 질문을 하는 까닭은, 계속해서 달리는 행위 자체에는 자유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자유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 있지 않고 한 사람의 내면세계에 있다. 따라서 완전히 동일한 행위를 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활발 발한 자유의 상태에 있는 동시에 다른 한 사람은 완전히 부자유한 상태에 있는 것이 가능하다. 심리적인 저항과 대립이 있는 곳, 경직과 긴장이 있는 곳, 그리고 자의식이 있는 곳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으며, 따라서 자유가 자리할 곳은 없다.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익숙한 표현이 있다. 매사에 정력적이고 열성을 다하는 태도로 임하는 것은 자기 발전과 성취의 측면에서는 긍정적이겠지만, 자유의 관점으로 주제를 한정하고 보자면 항상 자기 자신과의 대립의 상태, 무의식적 감정에의 저항 상태에 있는 사람은 자유로울 수 없다. 이는 합리화된 생각과 자신의 무의식적 본능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조건적으로 굴종하는(따라서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태와 그 형태만 다를 뿐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비록 자기 내면의 나약한 소리를 들었을지언정, 그 소리는 오로지 극복과 투쟁의 대상이 되어버리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까닭이다. 오로지 밀쳐내기 위해 벽을 세우는 것처럼, 저항하기 위해 자신의 무의식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개입할 틈이 없다. 극단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고행을 강요하는 중세 시대의 종교적 관습을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오로지 극복의 대상으로 삼는 태도는 성취에서 오는 만족감은 줄 지언정, 자유와 자유가 주는 충만한 행복감으로부터는 멀어지게 한다.


자의식으로 가득 찬 상태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자의식은 자신의 이미지를 강화하는 것이 유일무이한 목표기에, 늘 타인의 존재를 상정한다. 정확히는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상정한다. 따라서 타인의 존재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되며, 자신의 존재는 거울에 비친 상이자 이미지, 관념적 대상이 된다. 거울이든 상이든, 그 어느 것도 '인간'은 아니며, 이 과정에서 자신과 타인 모두 인간 아닌 것이 되기에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단절되기 마련이다. 금화 속에 둘러싸인 빈자처럼, 그 많은 인정과 박수갈채 속에서도 밀려오는 공허감은 바로 이런 관계의 단절, 자기 자신과의 단절에 기인한다. 타인과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자신의 이미지를 상정하고, 그 인정 욕구가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된다면, 우리에게는 '인정받지 못할 선택'을 할 여지가 없어진다. 이는 온갖 금은보화와 발전을 손에 넣었음에도 관계의 단절로 공허감이 난무하는 현 인류 사회를 빚어온 장본인이다. 현 사회가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의 대사처럼, '상식이 통하는 것도 고작 한 줌의 시간뿐인 세상'이 되어버린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우리 모두가 선택과 자유의 가치를 깨닫고 추구한다면 신뢰와 우정, 사랑과 유대감 같은 인간적이고 소중한 가치들이 인정받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은 저절로 따라오리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종교적 지도자들과 선각자들은 한 목소리로 자유를 논했다. 무의식에 끌려가지도, 저항하지도 않은 채 그 중간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하며 자유롭게 춤추는 곡예사야 말로 부처의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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