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요리는 자부심 혹은 사랑
잡식 동물을 검색하면 다음의 목록이 나온다. 비둘기, 사람, 개미, 곰, 들쥐, 생쥐, 햄스터, 다람쥐. 인간이 진정 잡식성 동물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도 있다. 턱관절 구조와 치아 형태, 침의 성분, 위와 소장의 길이 등을 비교할 때 오히려 초식에 가까우며 육식과는 해부학적으로 거리가 멀다는 충분히 일리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식생은 제쳐두고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인간은 잡식성이 맞다. 육체적 생존을 위해 무엇이든 먹어치우듯이, 인간은 자부심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먹어치워 그 재료로 삼는다. 해부학 측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간은 (식생의 측면에서) 잡식인가?'라는 논제와는 달리, '인간은 심리적으로 잡식인가?'라는 질문에는 그러한 논란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고도로 발달한 두뇌와 그로부터 파생된 독특한 정신 구조(이 정신 구조는 미래와 과거, 자신과 타인, 세계를 관념적으로 그려내는 능력을 지칭한다)를 감안하면 심리적 잡식이 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춘 유일하고 독보적인 동물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자아 정체성(Ego)은 육체와 마찬가지로 생존을 꾀하는 주체다. 두뇌를 통해 육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결국 자신의 독립적인 생존을 추구하는 공생의 관계다. 그리고 이 자아 정체성이 가장 좋아하는 주식은 자부심이다. 자부심이라는 요리의 식재료는 가히 인간을 심리적 잡식 동물이라고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다양한데, 몇 가지 예시를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부, 권력과 명예 등은 이제 진부할 정도로 전통적인 재료다. 지성이나 학벌, 직업 등 사회적 위치와 관련되는 재료들 역시 마찬가지로 질릴 만큼이나 오래 쓰여온 재료다. 기본적으로 타인과 구분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재료가 될 수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미술 또는 음악적 취향, 역사나 경제에 관한 지식, 원활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회적 능력, 인간에 대한 심리적 통찰 능력, 동물과의 교감 능력 등등. 타인과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들 역시 자부심의 좋은 재료다. 같은 문화권에서 타인과 구분되지 않는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 경제, 철학적 이념을 갖는 것, 동일한 패션 스타일과 유행을 따르는 것이 이런 류의 재료에 속한다.
즉 인간의 행동 양식 하나하나가 재료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자부심의 재료는 종류와 가짓수가 다양하다. 근간이 되는 재료가 무엇이건 간에, 파스타건 토르티야건 쌀밥이건 간에, 결과적으로 취하고자 하는 영양소는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으로 수렴하듯이 인간의 자아정체성이 필요로 하는 최종 영양소는 그 재료와 무관하게 자부심이다. 이 영양소가 결핍된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우울하고, 무기력하며, 자신감은 없다. 마치 며칠 째 밥을 굶은 사람처럼. 그런데 마음먹고 단식이나 소식을 행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에게서는 타의에 의해 굶겨진 흔적, 우울감과 무기력감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생명력과 조용한 열정만이 보인다. 필수 영양소를 취하지 못했음에도 나타나는 결과는 천지차이다.
자기 연민은 자부심의 좋은 식재료가 될 수 있는데, 이 특정 재료를 주제로 삼아 그 이유를 찾아보자. 자기 연민을 자부심의 재료로 삼고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줄 타인이다. 이 타인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오로지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이어도 무방하다. 굳이 사람이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이미 죽어 세상에 없는 인물이나 신 역시 도움이 된다. 중요한 것은, 자기 연민으로 자부심을 요리하려는 사람(요리사라고 칭하자)은 자기 자신을 이미지로서만 인식하면 되기에, 그 이미지를 비추어 줄 거울이 필요할 뿐이라는 사실이고, 그 거울이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지 아닌지는 개의치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요리사는 요리를 할 때 이런 주문을 외운다. '이렇게나 아프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이라니! 세상에 나처럼 불행하고 불쌍한 사람이 또 있을까'. 불행하고 불쌍한 것 역시 자기 자신을 타인과 구분되는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줄 수만 있다면 자부심의 식재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자기 연민으로 요리를 한 그릇 만들고 나면, 요리사의 메뉴에 등재되고 나면, 그것은 어지간해서 빠지는 일 없이 계속해서 재생산된다. 요리의 식재료는 다양하기에 다양한 음식을 시도해 볼 수 있지만, 일단 음식을 만들고 나면 반복해서 만드는 것이 자부심이라는 요리의 특징이다. 이 요리를 메뉴에서 지우려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요리사에게 자기 연민 스테이크 한 접시는 이미 자신의 정체성과 같아졌기에 무한한 자긍심을 주는 원천이고, 그만큼 비대해진 중요성을 지닌다. 따라서 메뉴에서 '자기 연민 스테이크'를 지우려고 하면, 즉 요리사를 아프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것에서 구제하려고 하면, 요리사는 분개한다(단, 아프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것이 스테이크로 요리화 된 사람의 경우에만!). 자부심을 빼앗는 것은 굶주린 사람에게서 음식을 빼앗는 것과 똑같다.
그런데 어느 날 요리사가 다음을 깨닫는다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까? '나는 자기 연민 스테이크에 집착하고 있다. 그 이유는 내가 자부심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자부심에 굶주려 있는 이유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나 자신이 두렵기 때문이고, 그 두려움은 결국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되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나는 영원히 굶주려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깨달은 요리사에게 자기 연민 스테이크를 빼앗으려 한다면, 처음에는 쉽사리 놓아주려 하지 않겠지만 가능성은 있다.
자꾸 소금물을 들이켜면 계속해서 갈증이 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만이, 소금물을 퍼마시는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길 아닌가?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소금물 마시기를 그만둔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해소될 수 없는 갈증을 채우고자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지속하고 있는 자기 모습을 한 번이라도 떠올릴 수 있다면, 자신의 그러한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기 연민을 불러일으키지 않겠는가? 자기가 얼마나 불쌍한지 알아봐 줄 타인의 존재가 없는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진정한 자기 연민은 자부심의 식재료가 될 수 없다. 타인의 존재는 상정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만의 대화가 있는 이 순간에 느끼는 자기 연민은 자신을 어여삐 여기는 것이며, 이 느낌이야말로 자기 자신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힘이 닿는 한에서 최대한 좋고 행복한 것, 바람직한 것, 건강한 것을 주고자 하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 감정이 바로 예수가 말하고 에리히 프롬이 말했던 '사랑'이다.
자신을 이미지로 대하고, 그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느꼈던 거짓 자기 연민은 자부심을 위한 식재료로 그칠 뿐이지만, 진정 모든 것을 체념하고 놓아버리는 순간, 바닥을 치는 순간, 일말의 자부심마저 불필요하게 느껴지며 모든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껍데기가 녹아 사라지고 날 것 그대로의 자신을 마주하는 순간, 그리고 아등바등 살아온 자신에게 연민을 느끼며 이제부터라도 세상의 좋은 것들을 주며 보듬어주겠다고 느끼는 순간, 진정한 자기 연민이 되살아나며 당신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