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존중한다면 대하기에 앞서 손에 묻은 흙을 씻어야 한다.
나는 이 흙을 쳐다보느라 아직 못 씻었고, 그래서 오늘은 또 다시 난장판 흙밭이다.
나는 용기와 사랑을 내 안에서 한 때 찾았지만, 나는 지금 다시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
그리고 내 안에서 그것을 잃어버린 지금, 다시 어디서부터 탐색을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
지난번의 발견 이후 그것을 잃어버리기까지 흐른 시간의 밀도는 더욱 커졌고 경험의 색채는 더욱 회색빛이다. 나는 많은 것들 앞에서 작아졌고 분노했다. 사랑, 용기나 자유를 입에 담기엔 부끄러운 정신의 상태를 경험하고 있다. 두려움과 분노에 대해 기억을 더듬어 논하는 것은 장려할 만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용기와 사랑에 관해서만큼은 기억이 아닌 생생한 감각에 이끌려 적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고백컨데 나는 두려움의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해 온 그곳이다. 언제 들어왔는지, 입구에서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 무엇인지 기억하지 못할 만큼 아무런 날, 아무런 순간에 들어와 버렸다. 나를 이곳으로 이끈 최초의 이정표가 무엇이었을까 기억을 더듬는 것도 이미 오래전 관뒀다. 어찌 됐건 지금의 나는 거울 속 눈빛을 좋아하지 않는다. 긴장한 성대에서 나오는 억눌린 음성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녀석은 지긋지긋하리만큼 익숙하다.
나는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특유의 방식이 있음을 안다. 이 선글라스를 끼고 바라보면 세상은 회색빛이고 희망은 헛된 꿈이다. 세상에서 두려움만을 읽어 들여 내면으로 송출하는 고장 난 확성기에서 다시 소음이 들린다. 세상과 나, 둘 중 누가 먼저 분노했고 누가 먼저 두려웠는가? 세상이 분노로 가득하기에 내가 분노를 보는가, 내가 두려움으로 가득하기에 세상을 두려움으로 읽는가? '내면에 두려움과 분노가 있으면 그 합당한 이유를 바깥에서 찾아내기 위해 처절한 회색 필터를 뒤집어쓰는 것이 인간 정신의 특징'이라는 말이 자명한 사실로 다가왔던 때가 있다. 이번이라고 다를 리 없겠지? 그러나 역시 최종 진단은 터널을 벗어나고 나서야만 내릴 수 있다. 내 Ego는 기특하게도 매사에 조심스럽기에, 지독한 의심의 늪에 내 머리를 처박고 한참을 휘젓기 일쑤다. '정말, 이게 맞아? 저게 맞고 이게 틀린걸 수도 있지 않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늪에 머리를 처박은 채로, 터널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채로, 이번이라고 다를 리 없겠지?라고 되뇌며 위안을 갈구하는 마음의 상태는, 현재를 벗어나야 마땅한 나쁜 것으로 '규정하는 마음'에 근거한다. 그리고 규정하는 마음이 있는 곳이라면 그게 어디든 간에, Ego가 영역 확장의 기회를 옅보며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지난날의 탈출 경험에 대한 기억, 책을 통해 습득한 심리와 영성에 관한 지식, 비슷한 처지에 놓여 헤매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기로 유명한 여러 문구들은, 어느 누군가에게 한 때는 효험을 발휘했던 과거의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과거의 것들은 모두 기억될 뿐이기에 죽은 것이며, 죽은 것은 Ego를 한 단계 진화시키는 제물로 널리 쓰인다. 그 녀석은 자신의 패배를 교훈 삼아 더욱 치밀해지고 영리해진다. 소를 잃고 고친 외양간은 한 층 견고해지고 넓어졌기에, 똑같은 탈출구로 나가본들 아득하게 넓어진 울타리 속에 다시 갇혀 버린 신세만 확인하게 된다. 이 이상한 감옥은 내가 탈출할 때마다 스스로 진화하고, 다시 붙잡히고 나면 탈출을 위해 새로운 방법을 궁리해내야 한다. 나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는 이 녀석은 내 그림자다. 나는 내 그림자에게 붙잡혔다가, 다양한 방면을 물색한 끝에 그림자가 없는 완전한 포용의 빛 속으로 구원되고는, 한 눈을 판 사이 다시 그림자에게 붙잡히고 만다. 영원한 술래잡기 끝에서 이제는 누가 술레였는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다. 내가 이 녀석을 붙잡는 건가 이 녀석에게 붙잡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