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 ㅡㅡ마, 엄ㅡㅡ마....”
경주 여행 둘째 날, 황리단길 근처의 대로를 걷고 있었다. 멀리서 누군가가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딸아이랑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며 무심히 고개를 돌렸는데 택시 안에서 정말로 딸아이가 손을 흔들고 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연휴를 맞아 아이들과 경주로 가족여행을 갔다. 마침 일요일이라 미사를 보기 위해 남편과 나는 먼저 길을 나섰다. 아이들은 천천히 나와서 황리단길에서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다.
숙소가 불국사가 있는 마을인 마동이었는데 연휴를 맞아 불국사 앞의 교통체증이 심해서 30분 거리를 한 시간 넘게 걸려 도착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사가 조금 길어져서 끝자락에 조금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
교통체증을 생각하니 아이들과 만나 점심을 먹기가 어려울듯해 각자 점심을 먹고 예약된 사진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는 남편이 좋아하는 칼국수를 먹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것이다. 그래도 쿨하게 인사하고 우리의 길을 가고 있는데 아이들이 뒤따라왔다. 황리단길 입구에서 많이 막혀서 택시에서 내렸다는 것. 결국 점심을 함께 먹기로 했다. 럭키비키잖아.
처음 경주에 왔을 때 우연히 들렀다가 우리들의 맛집이 된 경주손칼국수의 칼국수맛을 남편은 아이들에게도 꼭 먹이고 싶어 했는데 이렇게 소원성취를 했다며 남편은 싱글벙글이다. 리뷰를 보고 썩 내켜하지 않았던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 나도 좋다. 아이러니하게도 연휴의 교통정체가 만들어준 행복이었다.
점심을 먹고 예약한 사진관에 가서 가족사진도 찍고, 황리단길과 대릉원을 즐기고, 아이들이 마련한 어버이날 저녁식사도 맛있게 하고, 동궁과 월지의 야경까지 뚜벅이 여행을 하며 그 또한 행복했다. 연휴라 사람들이 많이 몰려 렌트를 하지 못하고 뚜벅이 여행을 하고 있는데 렌트를 했으면 차가 짐이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우리 모두 흐뭇해했다. 계획이 틀어진 것이 오히려 여행을 즐겁게 해 주었다. 삶은 참 어떻게 전개될지 모를 일이다.
여행 사흘째인 사월초파일에는 아이들과 따로 여행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야심 차게 준비한 한옥 스테이에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기로 했고 우리들은 불국사를 관람하고 산길을 걸어서 석굴암에 들른 후 토함산 등반까지 하는 일정이었다. 숙소의 위치상 걸어서 여행하기 딱 좋은 코스다.
불국사 들어가기 전 십원빵을 사기 위해 가게에 들렀는데 아저씨가 우리의 여행코스를 듣더니 칠불암을 추천한다. 토함산보다 전망이 훨씬 좋아서 자신이 좋아하는 곳이란다. 토함산 정상은 못 가봤지만 나머지는 익숙한 곳이라 칠불암으로 마음이 확 끌린다. 팔랑귀라고 놀리는 남편의 말을 인정하며 버스를 타러 가는데 우리가 타야 할 버스가 막 지나간다. 그리고 다음 버스는 정보가 없다. 오늘도 여전히 교통체증이 심해서 언제 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뜻대로 안 되네 하고 마음을 접고 불국사로 향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은 불국사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이다. 청운교, 백운교 사이에 법요식을 위한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절 전체가 연등으로 덮여 있다. 연등마다 달려 있는 소원이 사람들 만큼이나 많다. 부처님 탄생하신 날이니 그 소원들이 잘 전해지겠지?
남편은 이 북적거리는 분위기가 좋은지 여기에서 법요식도 보고 절밥도 먹으며 힐링하잔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다르다. 예전에 한 번 올랐던 석굴암 가는 산길에 대한 기대도 있고, 토함산 정상에 대한 기대도 있다. 불국사는 다시 내려와서 보기로 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오월의 신록이라는 말답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 석굴암에 도착했다. 석굴암 역시 사람이 많아 부처님을 보는 줄이 장난 아니게 많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서 토함산 등반을 먼저 하기로 했다. 내 기억에 석굴암 전각 옆에서 토함산 가는 길이 있었던 듯해 전각으로 올라가니 석굴암 석불이 살짝 보인다. 그런데 이게 웬일? 사람들이 유리막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초파일날은 석굴암을 완전히 개방하여 부처님을 직접 볼 수 있단다. 처음이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지. 반가운 마음에 다시 내려가 줄을 섰는데 뒤따라오던 남편이 다른 전각으로 들어가더니 전화를 했다. 빨리 그쪽으로 오라고. 여기서 점심공양을 할 수 있다고. 이건 또 웬 횡재? 바삐 가보니 석굴암에서도 점심식사를 따로 제공하는 것이었다. 암튼 밥냄새는 잘 맞는다니까. 언제나 배반하지 않는 담백하면서도 맛있는 비빔밥을 먹는데 그냥 웃음이 나온다. 남편은 나보다 10배는 좋아하는 듯.
석굴에 들어가는 줄은 길었는데 막상 기다려보니 진행이 빨랐다. 20분 만에 입장해서 부처님과 주변의 조각, 그리고 천장까지 바라보는데 가슴이 벅차올랐다. 밖에서 볼 때와는 다른 거대함과 정교함에 감탄이 절로 난다. 언제 또 이렇게 완전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토함산으로 가는 길은 석굴암에서 한참 걸어 나와 있는 일주문 옆에 있었다. 그리 가파르지 않은 산길이 역시나 예쁜 초록을 머금었다.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산철쭉이 활짝 피었다. 안쪽 능선으로는 철쭉 꽃밭이라 할 정도로 환하다. 토함산 정상에서 바라본 푸른 산의 근육까지 아름다워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느낌이었다.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에 받았던 과자 선물세트 같은. 부처님의 탄생일이라 이런 선물을 준비했나?
틀어진 계획 속에서 만난 행운을 아이들에게 흥분해서 이야기하니 아이들이 말한다.
오늘 완전히 럭키비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