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행 비행기에서 몰입을 배우다
장거리 비행이 체질
수하물을 맡겼지만 짐의 무게는 그대로였다. 분홍색 에코 가방에는 14시간 비행의 로망이 잔뜩 들어있었다. 일기장부터 마스크팩, 책, 필름카메라, 삼각대 등과 함께 기내에 들어섰다. 이코노미석이 비정하게 좁다는 건, 저가항공으로 동남아시아 여행은 가끔 갔기 때문에 익히 알고 있다. 간격은 저가항공과 비슷한데, 다른 게 있다면 좌석 앞에 모니터가 있다는 점이다. 내 자리는 오른쪽 세 자리 중에서 복도와 가까운 자리였다. 체크인할 때, 좌석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창밖보다는 자유로운 화장실을 택했다.
옆자리에 누가 올지 설렜다. 여행길만큼 친해지기 좋은 장소도 없다. 외국인이면 짧지만 간단한 인사 건네면서 스몰토크는 가능하겠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도 옆과 주변 좌석까지 아주머니들이 앉았다. 아주머니들은 자식들에게 장거리 비행의 꿀팁을 들었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준비 자세에 돌입했다. 건너편 아주머니는 휴대용 발받침을 자리에 걸다 승무원에게 제지당했고, 옆에 앉은 아주머니는 다리를 조금이라도 들기 위해서 기내에서 나눠주는 방석을 반으로 접어 엉덩이 밑으로 끼워 넣었다. 나는 곁눈질로 보고, 아주머니들이 여행사에서 준비한 서류를 나눠 가지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잽싸게 방석을 따라 접어 넣었더니 훨씬 편했다. 엄마와 무슨 대화를 해야 되는지 몰라서 괜히 텔레비전 채널만 돌리는 것처럼 아주머니들과의 스몰토크도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멍하니 좌석 앞 모니터만 만지작거렸다. 먼저 용기 낸 건, 창가석에 앉은 아주머니였다.
“혼자 뉴욕 가요?”“네...”“휴학하고 여행가나 보네요.”“아뇨. 회사 휴가를 냈어요.”
아주머니는 내 나이를 듣더니 깜짝 놀라셨다. 기분 좋은 출발이었다. 물품을 주는 비행은 처음이라 대충 눈대중으로 파악하고 헤드셋을 꼈다. 헤드셋은 소리가 나오는 기능보다는 귀를 막아주는 기능이 더 컸다. 비행기 소리가 큰 것인지, 영상 소리가 워낙 작은 것인지 자막이 나오는 영화만 볼만했다. 옆에 아주머니들이 헤드셋에서 소리가 나지 않아 도움을 청하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동안이라는 칭찬도 받았으니 내가 당당히 나섰다.
“헤드셋 코드는 여기 구멍에 이 방향으로 넣어야 해요.”
“역시 젊은 사람은 다르네.”
아주머니는 그 말을 1분도 되지 않아서 회수해야 했다. 헤드셋은 내가 알려준 방향의 반대로 꽂고 나서야 소리가 났다. 속으로 머쓱한 마음을 감추며, 29살은 모든 걸 간파하기엔 이른 나이라고 위로했다. 젊은 사람의 인간적인 모습을 포착한 아주머니들은 그 뒤로 나를 편히 대했다. 고작 일주일인 내 일정과는 달리, 패키지여행의 일정은 2주나 되었다. 아주머니는 꾸깃한 일정표를 보여주며, 하루 동안 이렇게 많은 곳을 가야 한다고 싫은 척하지만 내심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 우정 여행을 무려 뉴욕으로 결정한 아주머니들의 리더는 누구일지 궁금했다. 혼자서 서울조차 못 가는 엄마와 대비되자 아주머니들의 용기를 고작 패키지여행이라고 가치를 깎아내려 합리화했다. 엄마는 걱정 그 자체에만 집중할 뿐, 그 외에는 의도적으로 도외시하는 사람이다. 여행은 좋아하지만, 누군가 책임지고 데리고 가지 않으면 알아보거나 절대 나서지 않았다. 하다못해 작은 언니네가 사는 서울 기차표를 끊을 때마다 알려주지만, 엄마는 이 나이 되면 까먹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딴청을 피우며 듣곤 했다. 나이와 주체성은 반비례하는 것일까.
아주머니는 씁쓸한 내 마음과는 반대로 돋보기안경을 꺼내 쓰며 뉴욕 여행 책자를 열심히 뚫어져라 읽었다. 비행기가 안정권에 들어서자 땅과 차원이 다른 햇빛이 창으로 들어왔다. 너무 강한 빛 때문에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어 안정권인 것처럼. 다들 창문 커버를 반틈씩 닫았다. 복도석에서 반만 열린 창문으로 바깥을 보려고 기웃거리자, 창가석 아주머니가 바깥이 더 잘 보이도록 커버를 살짝 올려주었다.
“이따 해지고 노을이 보일 때, 내가 자도 깨워요. 핸드폰으로 노을 찍어줄게요.”
사진 찍을 때를 정확히 아는 어른은 매력 있다. 처음엔 옆자리가 아주머니인 걸 알고 지레 겁먹었다. 두 분이 떠드는 소리에 시끄러우면 어쩌나. 말을 너무 많이 걸거나 간섭하면 어쩌나. 걱정과는 달리, 우리 3명은 붙어있지만 처음 대화 말고는 좁은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덩달아 나도 14시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로망을 하나씩 좌석 테이블에 펼쳐놨다.
몰입
첫 번째는 영화였다. 픽사의 <소울>을 뉴욕행 비행기에서 보다니, 영화관에서 처음 봤던 기분을 초월할 정도로 영화에 집중했다. <소울>의 배경지인 뉴욕을 내 두 눈으로 확인하러 가는 길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서 심장이 남몰래 뛰었다. 주인공이 재즈 공연 중 피아노에 몰입하면서 주변이 하나씩 사라지는 장면은 ‘몰입’이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표현한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주변이 사라지는 기분이 든 적 있는지는 이 일에 대한 진심을 판단하기 좋은 기준이다. 지금 글 쓰는 이 시점에도 딴짓을 많이 하는 나는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앞에 놓고 정신은 옆에 앉은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온전히 내 글에 몰입해서 써본 적이 있었는지를 <소울>을 볼 때마다 각성하게 된다. 주인공은 그토록 꿈꾸던 재즈 무대를 마치고 공연장을 나오는 길에 허무한 감정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옆에 있던 동료에게 묻는다.
“이다음은 뭐죠?”
“다음은 없어. 다시 연주를 반복하는 거야.”
그 장면에서 뉴욕을 다녀온 직후가 걱정되었다. 뉴욕만 바라보고 8개월을 보냈는데, 아무것도 없이 일상생활을 다시 보낼 수 있을까. 여행 전부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곧바로 정신 차렸다. 여행에 몰입하자.
영화 두 편을 보고 나자, 기내가 캄캄해졌다. 다들 앉은 자세로 잠을 청했다. 화장실에서 간단한 세수와 양치를 하고, 가방에서 마스크팩을 꺼내 얼굴에 붙였다. 연예인이 하는 일은 한번쯤은 꼭 해보고 싶다. 다들 잠들면서도 불편한지 꼼지락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마스크팩의 수분이 피부에 스며들기를 기다리며 책을 꺼내 읽었다. 기내에서 주는 프레즐과 맥주도 알차게 리필해서 먹었다. 하늘에서 먹는 음식은 고무를 뜯어먹어도 기분 자체가 다르다. 끊임없이 리필한 맥주와 와인은 이코노미석에서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사치였다. 세잔을 연거푸 마시고 잠에 들었다가 일어났더니, 비행이 2시간 밖에 남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드디어 도착했다는 듯이 기지개를 켜는데 나는 한없이 아쉬웠다. 돌아올 때의 비행도 있지만, 여행 가는 길의 비행과 설렘의 차이가 크다. 아직 에코 가방에는 써보지도 못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기내가 조금씩 흔들리더니 허허벌판 땅이 나타났다. 불이 켜지고, 기장님의 방송이 들렸다.
“14시간의 비행 끝에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좋은 여행 되십시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설렘보다 긴장감과 책임감이 몰려왔다.
"<(재) 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 2024년 대구 특화 출판산업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지원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