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은심 Aug 21. 2024

JFK공항에서의 10월 3일

내가 너만큼 여행할 수 있을까?

주눅이 잘 드는 사람은 여행지에서의 긴장감이 2배다. 주눅 드는 기준은 따로 없으나, 상대방의 기운이 주로 한몫한다. 하루는 서울 사는 친구 명태 따라 강남 간 날이었다. 향수 브랜드인 ‘탬버린즈’ 매장을 들렸다. 올리브영처럼 냅다 뚜껑을 열어서 테스트해 보는 시스템이 아니라, 매대 앞에 있는 직원에게 추천받고 직접 뿌려준 시향지로 맡아야 했다. 직원은 UFO를 떠올리게 하는 반질거리는 소재 의상에, 은색 아이쉐도우와 관자놀이까지 뻗은 아이라인으로 짙게 화장한 얼굴이었다. 직원이 시향지에 향수 이름을 적을 때마다 뾰족하고 은색광으로 반들거리는 손톱이 신경 쓰였다. 무심한 표정이 탬버린즈 직원을 더 신비스럽고 강남스럽게 했다. 그 기운에 기가 바짝 눌려버린 나는 향을 추천해 달라고 말하지 못했다. 쇼윈도 명품 가방 보듯 향수를 눈으로 맡았다. 명태가 매장을 구경하고 옆으로 오더니, 직원에게 물었다.     


“우디 한데 가볍고 시원한 향 있을까요?”     


명태의 당당한 요청에 내가 알던 친구가 아니라 서울 사람으로 보였다. 만날 때부터 강남 오는데 검은 티에 검은 바지가 뭐냐고 놀렸던 옷차림이 갑작스레 세련되게 느껴졌다. 명태는 선글라스를 벗어 머리에 툭 얹고는 직원이 준 시향지를 신중하게 맡았다. 명태가 원하는 향이 아니었는지, 사지 않고 매장을 나왔다. 명태는 알고 지낸 10년간 주눅 든 걸 본 적이 없다. 과에서 선배의 쓸데없는 불호령에도 말 한마디 지지 않았다.  

    

“MT 참석 안 한다는 게 잘못은 아닌 것 같은데요?”     


혼자 뉴욕을 먼저 여행한 것도 명태였다. 뉴욕에서 찍은 자유의 여신상과 월스트리트의 황소 사진을 보여주며 뉴욕이 혼자 다니기 좋은 곳이라고 추천했었다. 사진 속, 명태처럼 자신 있고 당당한 사람으로 엮이고 싶어서 뉴욕으로 덥석 정했는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악명 높은 입국심사장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14시간을 함께 날아온 아주머니들은 가이드가 미리 준비한 서류를 챙겨 들고 내 뒤에 줄을 섰다. 우리는 비행기 안에서 짧게 대화하던 것에 익숙해져 괜히 밖에서 보니 어색했다. 아주머니들은 짧은 영어를 반복해서 속삭이느라 대화를 나눌 여력도 없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미리 메모해 둔 예상 답변을 열심히 중얼거렸다. 그러다 천장에 달린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그저 큰 시계인 줄 알았다. 미국 쓰레기통이 그렇게 크다더니, 시계도 크기가 어마하네. 자세히 보니 아빠가 생일이 다가오면 딸들에게 사달라는 듯이 노래를 불렀던, 크기는 달걀인데 가격은 바위만 하기로 유명한 ‘로렉스’였다. 로렉스 금장 시계는 여행객을 환영하기보다는 입국장의 위엄을 더해서 긴장하게 했다. 30분 정도 기다리자, 내 차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대기선에서 본 출입국심사관의 표정은 두 가지였다. 예민하던가 심드렁하던가. 나는 심드렁한 심사관에게 당첨되었다. 장전해 둔 미소를 발사하며 모자를 벗었다. 기름지고 두피와 이마에 찰싹 붙은 머리카락을 보여준 다음, 지문을 찍었다. 심사관이 여권 사진을 이전 사람보다 3번은 더 번갈아 보았다. 그 시간이 굉장히 길게 느껴졌다. 도착하기 전에 뭐라도 찍어 발랐어야 했나 싶을 때, 심사관이 여권에 도장을 대충 찍었다. 여권을 나에게 건네주기도 전에 다음 사람을 불렀다.      


“넥스트(Next)”     


아리아나 그란데의 노래 중에 <thank you, next>가 생각났다. 미국에서 귀찮은 일을 해치우고 다음 귀찮은 일을 받을 때, 실제로 이런 문장을 많이 쓰는구나. 허무했다. 서류만 10장 준비했는데 고작 1분 만에 끝나다니. 드라마나 영화처럼 스몰토크로 환영하는 국가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다. 뉴욕은 스몰토크 강국답게 좀 다를 거라 기대했는데 역시 일하기 싫은 건, 만국 공통이다. 짐 찾는 곳에서 캐리어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여권을 펼쳐봤다. 입국 도장에서 뉴욕이 선명하게 찍혔으면 좋겠다는 바람과는 달리, 바람 불면 날아갈 듯이 희미했다.      


JFK공항은 건물이라고 규정하기에는 단어에 초과되는 느낌이다. 오히려 한 지역이라고 보는 게 적당하다. 인천공항은 터미널이 2개라면 JFK공항은 터미널이 9개다. JFK공항을 2번이나 갔지만, 건물의 전체적인 외관을 본 적이 없다. 한눈에 들어오기도 힘든 규모이기 때문이다. 아시아나 항공과 대한 항공은 터미널 1로 내리게 되는데, 여기서 목적지인 맨해튼으로 가려면 터미널 8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내려서 지하철을 2번이나 갈아타야 했다. 한국에서도 지하철을 종종 반대로 타는 사람으로서 깔끔하게 맨해튼으로 바로 가는 유료 셔틀버스를 예약했다. 여행의 시작부터 일정이 꼬이는 건, 최악이었다. 빨리 숙소로 가서, 씻고 새 단장으로 명태처럼 당당하게 여행을 시작하고 싶었다. 

이전 06화 장거리 비행이 체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