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변수를 즐기는 자가 일류다.
뉴욕 여행이 한 달도 남지 않았을 때, 친구들이 물었다.
“계획은 다 세웠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당연하다고 했다. 하지만, 속내는 절벽 끝에서 울리는 비상벨이 무자비하게 울리고 있었다. 비행기 외에는 어떤 일정도 정해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계획 짜기가 싫은 걸까. 지금까지는 큰 틀만 정해두고 여행을 떠났다. 친구 소소와 제주도를 갔을 때는 하루에 한 가지 활동만 계획했다. 첫 번째 날에는 바다 수영, 두 번째 날에는 해안도로 자전거 드라이브. 그 외에는 제한 두지 않았다. 지나가다 맛있어 보이는 식당이 있으면 바로 방향을 틀었고, 노을이 붉게 가라앉은 해변에서는 다음 일정을 취소하고 벤치에 앉아 일몰을 구경했다. 즉흥적으로 세운 계획은 또 즉흥적으로 변했다. 느슨한 여행이 소소도 마음에 들었는지 붙어 다닌 2박 3일간 부스러기 같은 갈등조차도 없었다.
반면에 뉴욕은 느슨한 여행 자체가 사치다. 일분일초를 쪼갠 촘촘한 계획이 아니면 지옥의 물가를 자랑하는 뉴욕에 올 이유가 전혀 없다. 느슨한 내가 촘촘한 뉴욕을 선택했으니, 계획으로 책임을 져야 했다. 결심했다는 듯이 노트북을 펼쳤다. 하얀 화면에서 규치적으로 깜빡이는 커서를 뚫어지게 보자 머릿속이 더 백지화되었다. 초등학생 시절에 방학 계획표를 세울 때면, 수면시간만 12시간에 낮잠시간도 꼭 넣던 사람인지라 감도 잡히지 않았다. 뉴욕을 필요 이상으로 알고 있다는 것도 한몫했다. 비행기를 예약한 8개월 전부터 수많은 명소를 검색했다. 기대가 부풀어 오르자 나도 모르게 회사에서 “꺅!”소리를 낼 정도였다. 옆에 앉은 회사 동료는 내가 로또라도 당첨된 줄 알았다. 모든 인종이 어울려 사는 만큼 보고 즐기고 먹을 게 다양했다. 이걸 일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어떻게 욱여넣나.
1일 차 일정을 다 세우기도 전에 가장 큰 오류를 찾았다. 비행기만큼 중요한 숙소를 찾아보지 않았다. 아니, 외면했다는 말이 더 적합하겠다. 스테이크와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찾아보며 신나 있는 내 옆에서 숙소가 손을 마구 흔들었는데도 애써 모른 척했다. 어마한 숙소값으로 들뜬 기분을 초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뉴욕을 먼저 다녀온 명태에게 숙소 창밖에 도시 전경이 쫙 펼쳐진 곳을 찾고 있다고 하자, 명태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너 아직 숙소 찾아보지도 않았지?”
들켰다. 호텔 사이트에 들어간 지 1분 만에 명태가 콧방귀를 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1박에 최소 60만 원부터 시작하는 호텔은 자연스레 제외되었다. 결국, 하루 10만 원이었던 숙소 예산을 15만 원으로 올리자 괜찮은 호스텔이 눈에 보였다. 빌딩 외벽이 창밖의 전부였지만 말이다. ‘뉴욕’ 사전에 가성비는 절대 없다. 숙소는 3박과 2박을 나누어 맨해튼에 한 곳, 브루클린에 한 곳을 예약했다. 맨해튼과 브루클린을 편하게 여행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나는 여행에서 변수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변수를 즐기는 자가 여행에서 일류다. 뉴욕 또한, 일류의 마음이었다. 문제는 변수가 여행 전부터 찾아왔다는 점이다. 브루클린 숙소를 예약한 에어비앤비로부터 호스트가 내 예약을 취소했다고 통보받았다. 그것도 여행을 떠나기 2주 전에 말이다. 미숙한 영어 실력이지만, 메시지에서 ‘cancel’이란 단어는 유독 잘 보였다. 혹시 프로필 사진이 너무 수상해 보였나 싶어서 다시 봤다. 너무나 순수한 얼굴이었다. 에어비앤비에 연락해도 호스트가 취소했다는 말 외에는 들은 말이 없었다. 피가 차갑게 식어 몸이 서늘해졌다. 브루클린 거리의 커다란 쓰레기통 옆에서 캐리어를 끌어안고 잠드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다음 날, 아무것도 남아있는 게 없겠지.
나는 당황하면 투명해진다. 누가 봐도 심각한 일이 터진 사람의 얼굴이 된다. 그리고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회사 일이 밀려있었지만, 잠시 뒤로 미루고 뉴욕 숙소만 애타게 찾았다. 팀장님 자리에서 봤을 때는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그녀로부터 메시지가 와있었다.
“은심아, 모니터에 들어가겠다. 쉬면서 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로 키보드를 열심히 두들겼으니, 오해할 만도 했다. 나는 멋쩍은 이모티콘과 함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하다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결국, 브루클린 내에서 괜찮은 숙소는 찾을 수 없었다. 브루클린의 바로 옆, 퀸스로 동네를 옮겨야 했다. 말이 바로 옆이지 퀸스에서 브루클린과 맨해튼까지 지하철로 40분 넘게 걸린다. 편하게 여행하겠다는 전략은 시작하기도 전부터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여행의 조물주가 출국 전에 변수를 맛보기로 보여주는 날이었다. 원래 예능에서 가장 재밌는 순간은 돌발상황이 발생할 때다. 대본대로 흘러간 촬영은 오히려 망한 쪽에 더 가깝다고 한다. 여행도 이 관점이 호환된다. 돌발상황은 여행을 더 풍족하게 한다는 면에서 이번 숙소 해프닝은 오히려 기대감을 더 불어넣어준 격이다. 이렇게 글감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물론 해결된 이후에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