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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심 Sep 08. 2024

지금 필요한 건, 휴양이 아닌 새로운 영감

맨해튼과 나 사이에는 물과 기름만큼이나 분명한 단층이 존재했다. 공항버스에 내려서 유심을 고치고 올림푸스 빌딩 사이를 걷는 내내 신나면서도 얼떨떨했다. 안전지대 없이 절벽에 서 있는 듯한 아찔한 기분도 들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소매치기당하지 않을까. 조금만 눈 마주치면 위협당하지 않을까. 이색적인 거리를 구경하면서도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화려하고 잔뜩 꾸민 뉴요커들 가운데 서 있는 내가 이질적이었다. 비행기에서 구겨 앉는다고 무릎이 잔뜩 늘어난 바지와 누렇게 뜬 얼굴을 가리느라 푹 눌러쓴 모자가 위축되었다. 얼른 숙소로 가서 뉴요커답게 변신하고 싶었다.     

첫 번째 숙소는 여성 전용 호스텔이었다. 맨해튼 가운데에 있어 어딜 가도 이동이 편했다. 무엇보다 호스텔 건물 입구에서 보면 길게 뻗은 도로 끝에 록펠러 센터가 우뚝 솟아 있었다.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록펠러 센터는 뉴욕의 재미를 더했다. 아침에는 희미한 공기 사이로 보여 거대한 고목나무처럼 느껴지다가도, 점심에는 건물 외벽에 햇빛이 반사되어 태양의 역할 대신하는 것처럼 보였다. 방에서 보이는 창밖은 옆 건물이 전부였다. 그것도 나름 재밌었던 건, 밤이 되면 새까만 유리 벽이 환한 창문이 되어, 커튼 너머로 다른 세상이 살짝 보였다. 6명이 함께 생활하는 호스텔에는 예상과는 반대로 친화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침대마다 파티션을 놓아 각자의 영역을 만들었다. 나만 파티션이 없었지만, 오히려 좋았다. 파티션으로 가려놓은 곳 외에 모두 내 영역이 되었기 때문이다.      


다 만족스러운데 딱 하나가 불편했다. 6명에서 생활하는 호스텔은 화장실이 딱 하나뿐이었다. 심지어 화장실과 침대 사이가 좁아 샤워하는 소리와 변기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여행만 가면 변비가 심했던 나는 쾌적한 여행을 위해 유산균을 틈틈이 챙겨 먹었다. 한국에서는 유산균을 아무리 먹어도 효과가 없더니, 뉴욕에 오자 장까지 설렜는지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두 번째 밤, 침대에 눕자 배가 알싸해지기 시작했다. 긴급이다.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바지를 내리려던 찰나에 이건 보통의 소리가 날 것 같진 않았다. 그 이상의 것이 예상되었다. 대변보는 소리로 전 세계 사람들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객들이 본국으로 돌아가 한국은 K-POP이 아닌 K-bboong으로 유명하다고 말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바지를 올리고 나왔다. 사실, 믿는 구석이 따로 있었다. 복도에 또 다른 화장실을 오는 길에 봐두었다. 복도 화장실로 들어와 문을 닫는데 경첩이 녹슬었는지 삐거덕거리면 완벽히 닫히지 않았다. 하지만, 괄약근이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어 최대한 문을 밀어 넣고 변기에 앉았다. 잠시 후, 개운한 마음으로 손을 씻었다. 만족스러운 배출이었다고 생각하며 문을 당겼다. 아뿔싸. 문이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힘을 써도 열리지 않았다. 매달리듯 당겨봐도 소용없었다. 모두를 깨울 수 없다고 복도에 있는 화장실을 쓴 거였는데 이젠 꺼내달라고 ‘헬프미’를 외쳐야 했다. 그 순간, 문 건너에서 구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Do you need a hand?(도와줄까?)”

“네! 아니... Yes. Please.”     


남자가 온 힘을 다해 문을 박찬 끝에 문이 고성을 지르며 열리기 시작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구조된 나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K-하트를 보였다. 이미 우리 방은 모두가 깨어있는 채로 큰소리가 나는 복도 쪽을 보고 있었다. 그 뒤로는 모든 일정을 끝낸 후, 집 근처에 있는 맥도널드 화장실을 꼭 들렸다. 도미토리룸이 1박에 13만 원이지만, 화장실이 단 하나뿐인 이 호스텔은 뉴욕에서 꽤 합리적인 축에 든다. 이보다 더한 물가가 뉴욕에는 만연했다. 지하철 비용만 편도에 4천 원이 넘고, 밥 한 끼에 3만 원은 기본이다. 아끼려야 아낄 수가 없는 뉴욕에 가성비 인생 29년 차가 발을 들인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경제적 가치는 ‘가성비’다. 무엇이든 싸고 합리적으로 살 수 있다면 장땡이다. 같은 돈이면 이왕 많은 물건을 가질 수 있으면 좋으니 말이다. 그래서 화장품이든 옷이든 제값 주고 산 적이 없다. 당장 필요한 물건이라도 할인하지 않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 


가성비는 오랫동안 내 몸에 동화된 만큼, 모든 영역에서 존재감을 드러낸다. 가끔 본가에 가면 한우 식당에서 외식한다. 하얀 마블링이 물결치는 빨간 한우는 불판 위에 올리자마자 육즙이 흘러내려 윤기를 더한다. 하지만, 막창 먹을 때처럼 공격적으로 젓가락을 들지 못한다. 한우가 얼마나 비싼지 잘 알기 때문이다. 괜한 밑반찬만 한 움큼 집어 먹으며, 위를 채운다. 엄마는 막내딸이 한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한우를 어떻게 싫어하겠는가. 한입에 다 넣었을 때, 터져 나오는 육즙의 고소함과 녹아내리는 식감을 잘 알고 있다. 한우 집에서 줄어든 배는 뷔페만 가면 여의봉이 되어 음식이 쭉쭉 들어간다. 심지어 나올 때는 종이컵에 쿠키까지 야무지게 챙긴다.     


여행도 휴양을 위해 동남아로 가장 많이 떠났다. 휴식이 필요했다기보다 물가가 저렴해서 경제적 부담이 적었다. 단기적으로 보면 평화롭고 충전의 의미가 크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항상 허무함이 마음 한편에 들었다. 허무한 마음을 감추고자 태국이나 베트남에서 찍었던 사진을 잘 돌아보지 않았다. 잘 놀아놓고 이렇게 허탈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은 9년을 거슬러 대학생으로 올라간다. 2개월이라는 긴 방학이 대학생 때는 주어진다. 한 달 동안 공장 아르바이트로 번 300만 원으로 유럽 여행을 떠나는 게 대부분의 방학 루틴이었다. 내 통장에는 아르바이트 없이도 300만 원의 여윳돈가 있었다. 학기 내내 도서관에서 일하거나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받은 장학금을 한 푼 쓰지 않고 쌓아두었다. 유럽 여행 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면서도 큰돈이 한꺼번에 쓸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짧은 동남아 여행을 다녀오거나 심심한 방학을 보냈다. 직장인이 되면, 장거리 여행 갈 만큼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말에 귀를 닫았다. 그런 조언을 무시하고 나에게 투자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지 못한 게 마음에 항상 걸렸다. 이번 뉴욕에서는 스스로 만회하는 느낌으로 부지런히 다니고 돈도 팡팡 썼다. 물론 내 의지와는 별개로 물가가 비싸서 뭘 사도 비싸긴 했지만 말이다.      


다시 첫째 날로 돌아와, 숙소에 도착하고 공항부터 주렁주렁 달고 온 피로에 쉬었다 갈까 고민했다. 어림도 없는 소리. 5일 안에 뉴욕을 맛이라도 보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오후 1시의 뉴욕은 숙소에서 어서 나오라고 성화였다. 빵빵 자동차 경적소리와 도로 한가운데서 야광조끼에 안전모를 쓴 현장직 사람들이 하수구를 수리하는 소리. 여행객들의 즐거운 웃음소리. 짐을 간단히 풀고, 얼른 샤워했다. 뉴욕의 첫 번째 일정인 센트럴파크를 떠올리며, 체크무늬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선글라스를 무심하게 머리에 툭 얹으며 생각했다.     


‘꽤 뉴요커 같은데?’     


자, 이제 뉴욕과 한데 어우러질 차례다. 그동안 나답지 않게 많이 쓰고, 많이 보고 많이 느끼자. 



"<(재)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 2024년 대구 특화 출판산업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지원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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