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트럴파크에서
뉴욕을 혼자 다녀오겠다는 막내딸의 말에 아빠는 밥 먹다가 멈칫했다. 마침 거실에 켜진 텔레비전에는 해외 인종차별 뉴스가 전해지고 있었다. 아빠는 미국이면 인종차별로 폭행 사건도 많지 않냐며 걱정했다. 이 말에 조금만 동의하면 아빠는 덥석 물어버릴 것이다. 아빠의 기나긴 잔소리를 멈출 강력한 말이 필요했다.
“좀 맞지 뭐.”
아빠는 할 말을 잃고 다시 수저를 들었다. 부모의 걱정이 가끔 돌부리처럼 느껴져 부담스럽다. 응원이 아닌 걱정만 들은 자식은 멀리 날아갈 수 없다는 걸 부모는 모르는 듯했다. 나의 오랜 꿈이었던 방송국에 취직했을 때, 부모가 가장 먼저 했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방송국은 돈 많이 안 준다던데.”
부모는 자식들이 가까이서 평범하고 안정적으로 살기를 바랐다. 첫째와 둘째는 그 바람을 들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막내딸인 나는 아니었다. 공기업도 아니고, 공무원도 아닌, 중소기업에 다니는 나는 서른이 넘었지만, 그들 눈에는 아직 취업준비생이었다. 밖에서는 남들만큼 열심히 사는 청년이었지만, 집에만 가면 뒤떨어지는 자식에 불과했다. 나는 그런 걱정으로부터 멀리 벗어나야 했다.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나도 인종차별을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다. 뉴욕 지하철에서 10대들이 아시안 여성에게 본인 나라로 돌아가라며 침을 뱉는 사건이 비행기를 끊은 직후에 보도되었다. 아시안 여성은 매년 수백만 명이 오고 가는 뉴욕에서 이런 일을 당했다는 게 믿을 수 없다며 탄식했다. 뉴욕행 비행기를 취소해야 할지 고민했다. 다른 나라를 알아봐야 하나. 하지만, 치한이 100% 보장되는 나라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심지어 국내도 마찬가지다.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대신, 준비를 철저히 했다. 인종차별 당했을 때, 할 수 있는 영어를 열심히 외워갔다. 자리 뜨기가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하지만, 당하기만 하면 억울하니 욕설도 외웠다. 우리말 욕도 몇 개 생각해두었다. 사투리 억양은 언어장벽을 초월하는 힘이 있다.
뉴욕의 지하철은 인종차별 뉴스의 단골인 장소다. 여행 내내 최대한 걸어 다녔지만 도보 30분 이상의 거리는 시간과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지하철 이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여행 첫날, 뉴욕의 메트로(Metro)카드를 구매할 수 있는 매표기에 줄을 섰다. 다들 쉽고 빠르게 사서 승차장으로 들어갔다. 미리 구매방법을 알아두어서 차례가 되고, 자신 있게 버튼을 눌렀다. 실전은 달랐다. 몇 번을 시도해도 결제 실패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떴다. 짐이 가득한 손도 불편하고 기다리는 줄도 길어지자 초조했다. 근처에서 총을 소지한 채로 누군가와 심각하게 대화 중인 경찰 ‘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말을 걸자 ‘빌’의 표정이 다소 부드러워졌다. 빌은 관리인 잭을 불렀다. 잭은 나를 대신해서 이것저것 기계를 만졌다. 신용카드를 한 15번 정도 긁었지만, 메트로 카드는 나타나 주지 않았다. 빌과 잭은 그만 포기하라며 다독였지만, 한국인의 지독함을 보여주고 싶은 오기가 생겼다. 한국인은 한다면 해내는 민족인 걸 보여주자.
“아이 윌 츄라이 원 모어!”
결국에는 다른 매표기에서 현금으로 결제했다. 그때, 핸드폰으로 4만 원이나 결제되었다는 알림이 떴다. 오기로 시도한 15번 중 4번은 결제만 된 채, 메트로 카드를 내놓지 않은 것이다. 한국이었으면 고객센터에 바로 전화를 걸 일이지만 참았다. 여행객을 도와준 빌과 잭의 노력 값으로 퉁 쳤다.
뉴욕의 역 이름은 길다. 34 St-Herald Sq / Uptown Local F M(역/방향) 이런 식으로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하철 타는 곳이 긴가민가해 지나가는 라틴계 마리 아줌마에게 센트럴파크 가는 길을 물었다. 마리 아줌마는 잠시만 기다리라더니 가방에서 돋보기안경을 꺼내 지도를 자세히 봐주었다. 마리 아줌마는 자신을 따라서 지금 들어오는 지하철을 타면 된다고 했다. 지하철이 세차게 들어오고 쿰쿰한 먼지 냄새가 코를 때렸다. 지하철 칸에 아시안은 오직 나뿐이었다. 쪽수가 불리해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시선을 내렸다. ‘센트럴파크’가 찍힌 구글맵을 몇 번이고 확대했다가 축소했다. 옆에 앉은 빌리 아저씨가 대뜸 센트럴파크는 다음 역에서 내리면 된다고 알려줬다. 어리둥절한 내 표정이 이해 못 한 줄 알았는지 한 번 더 천천히 말해주었다. 다른 승객들도 한두 마디씩 거들었다. 따뜻한 뉴욕 대중교통의 시작이었다. 지하철 내리기 전, 마리 아줌마에게 인사했다.
“해브 나이스 데이”
“굿럭”
행운을 빈다는 마리 아줌마의 인사에 정신이 들었다. 그래. 방심하지 말자. 마리 아줌마가 빌어주는 행운이 통했는지, 마지막까지 준비한 욕을 입 밖으로 꺼낼 일은 없었다. 나에게 뉴욕은 오히려 호의적이고 친절했다. 영어를 몰라서 의도치 않게 인종차별을 피한 것일까. 마지막 날, 공항으로 가는 셔틀버스 기사님께 인종차별 뉴스 때문에 겁먹었는데 오히려 친절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뉴욕의 기반은 ‘이민 사회’에요. 이민자들끼리 모여 사는 마당에 차별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뉴스에 등장하는 인종차별 자들은 한둘에 불과한 쭉정이에요. 쭉정이.”
하긴, 원주민을 몰아내고 자리 잡은 게 미국이니, 죄다 이민자들이 맞겠다. 실제로 뉴욕에서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정확한 국적은 모르지만,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자면 라틴계와 아프리칸이 예상보다 많았다. 절반 이상으로 예상한 유럽계는 적었고 아시안도 열에 둘 정도 보였다. 이들은 모두 일관적이지 않은 채로 존재했다. 그 누구에게도 동화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존재. 나와 다르다고 배척하지 않는 조화. 내가 가족과 함께 있을 때면 느끼지 못했던 존중이었다.
“가족이니깐 말해주는 거야.”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자취를 시작하며, 이런 말로부터 멀어지긴 했으나 아주 완벽히 벗어났다고 말하진 못하겠다. 가끔은 엄마의 ‘너 어떡하려고 그래’라는 표정에, 아빠의 ‘한심하다’라는 표정에 발목을 잡힌다. 적어도 이번 뉴욕만큼은 절대 그러지 않으리라 결심하며, 5 Av/59 St 역 출구로 나왔다.
지하철 출구로 올라오자 센트럴파크 입구가 보였다. 10분만 들어가면 옛날에 양떼목장으로 운영되었던 쉽 미도우(Sheep Meadow)라는 광활한 잔디밭이 나온다. 센트럴파크는 광활한 공원 안에 또 다른 웅장함을 품고 있다. 잔디밭에는 일관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돗자리 위에서 별다른 활동 없이 내리쬐는 따스한 가을 햇빛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자연 소리에 화음을 얹어 대화를 나누며 조화를 이루었다. 그 조화에 일원이 되고 싶어 가방에 돗자리를 펼쳤다. 포장해온 베이글 샌드위치를 뜯어 먹었다. 나름 뉴요커답게 찍힌 사진을 자랑삼아 친구에게 보냈다. 친구는 딱 한 마디 외에 별다른 말이 없었다.
“너무 한국인인데?”
"<(재)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 2024년 대구 특화 출판산업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지원 받아 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