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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은심 Aug 12. 2024

인천공항에서의 10월 3일

본격적으로 여행기 다운 이야기를 해보자.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거나 산책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으나, 인천공항을 걸어보는 것도 좋다. 서울 살았을 적에는 너무 심심하면 텅 빈 캐리어를 끌고 인천공항에 가곤 했다. 여행 갈 돈은 없고, 기분은 내고 싶을 때 가끔 했던 방법이다. 그러면 실제로 가라앉는 기분이 거품이 송송 나기 시작하면서 두둥실 뜰 때가 많다. 이번엔 진짜 짐을 한가득 실은 묵직한 캐리어를 들고 인천공항에 등장했다. 인천공항 외관에 적힌 터미널 1이 보이자 긴장되는 설렘에 심장이 요동쳤다. 자동문이 열리고 인천공항의 출국 게이트는 또 다른 여행지가 되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공항은 여행객과 항공사 직원의 분주함에 오후처럼 에너지와 활력이 돌았다. 바깥에서는 덜커덩거려 바퀴가 빠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캐리어가 공항에서는 제자리를 찾은 마냥 매끄럽게 끌렸다. 그 끌림에서도 설렘을 느낄 정도로 나는 각성되었다.      


아시아나 항공사의 게이트에는 줄이 길지 않았다. 대기줄 입구에서 누가 봐도 한국인인 승무원이 유창한 영어로 물었다.      


“Are you going to New York?”      


나는 아시아계 외국인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 짧은 대답에도 토종 한국인 발음으로 정직하게 말했다.   

   

“네.”     


다행히, 한국인 승무원에게 체크인받을 수 있었다. 온갖 서류를 프린트했지만, 정작 쓰는 건 여권밖에 없었다. 그중, 가장 비싼 종이는 비행기 탑승권이었다. 비행기 예약을 오랫동안 고민한 것 치고는 싸게 주고 산 편은 아니다. 왕복으로 180만 원. 출국 8개월 전에 샀기 때문에 저렴하기보다는 비싸지 않게 주고 산 느낌이다. 분명 이틀 전에는 170만 원이었는데, 제대로 결제하려고 보니 그사이에 10만 원이나 인상되어 있었다. 살면서 한 번에 170만 원을 결제한 적이 한 번도 없다. 5만 원이 넘는 옷은 만지작거렸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200번은 해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사지 않겠다고 결심한 게 무색할 정도로 다음 날에 가서 사버린다. 5만 원도 이 정도인데 170만 원은 오죽하겠는가. 이래서 돈은 써본 사람이 더 싸게 주고 사는 법이다. 180만 원을 결제하고, 텅 빈 계좌를 보자 마음 한구석도 뻥 비어버렸다. 여행이 확실해졌다는 기쁨보다 모아놓은 돈에서 180만 원 빼기 샘을 하며 결혼을 늦추거나 주말에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나 걱정이 먼저 들었다. 나에게 마땅히 투자하는 것도 주저하게 만드는 가성비가 질려 여행지를 뉴욕으로 정했으면서.      


대학생 때도 들어오는 장학금을 야금 모아서 계좌에 300만 원을 항상 쌓아놨었다. 300만 원은 절대 쓰지 않겠다는 의지로 카드조차 만들지 않았다. 그건 방송작가아카데미 수업료였다. 근데 막상 아카데미 오리엔테이션에 참가하고 도망쳤다. 신줏단지처럼 모신 돈이 한 번에 지출되는 것도 무서웠고, 그 돈을 주고도 방송작가가 되지 못할까 걱정했다. 그때의 도망이 어른이 되는 틈틈이 후회했다. 방송작가가 되지 못한 걸 떠나서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을 위해서 그 정도 돈도 투자 못하는 좀생이였다.      


체크인 직후, 면세관으로 들어갔다. 공항의 진정한 재미는 면세관 안에 있다. 백화점에서 절대 구경하지도 않을 화장품과 옷을 구경했다. 화장품 딱 하나만 사서 게이트 앞으로 갔다. 탑승까지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가방에 구겨 넣은 셀카봉으로 사진이나 찍을까 싶어 꺼냈다. 타이머를 맞춰놓고 찍은 사진은 그야말로 용량 낭비였다. 쭈뼛쭈뼛 뻗은 머리와 동네 슈퍼마켓에서 장 볼 것 같은 옷차림은 연예인들의 공항 사진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 올리지는 못하겠지만, 혼자 찍힌 사진이 귀해 남겨둔 채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재)대구디지털혁신진흥원 2024년 대구 특화 출판산업 육성지원 사업>에 선정·지원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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