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은심 Nov 16. 2024

호퍼, 왜 그랬어?

예술가 친구를 한 명 잃었다

마지막 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도슨트 투어를 예약했다. 앞전에 방문했던 뉴욕현대미술관과 휘트니 미술관에서 몰라서 답답한 작품의 연속이었기에 도슨트가 절실했다. 도슨트는 이집트관부터 시작해서 미국관, 로댕관, 유럽 조각 전시장 등을 차례대로 다녔다. 1관에서 2관으로 건너갈 때는 영화 <해리포터>처럼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두운 본관들과는 달리, 넘어가는 그 중간 지점에는 야외 광장에 와있는 듯이 볕이 따스하게 들어와 전시된 조각상들을 비췄다. 1관을 나오는 지점에서 보면, 봉긋한 아치 사이로 빛이 쏟아지면서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조각상이 우뚝 서 있는데 그렇게 오묘할 수가 없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원래는 본관 사이를 야외로 두었으나, 전시작품이 많아지면서 야외를 외벽으로 감싸 실내로 만들었다고 한다. 

도슨트 투어는 한 시간 반 동안 쉬지도 않고 작품을 구경했지만, 전체 작품의 절반도 보여주지 못했다. 도슨트 투어는 모네의 전시실에서 끝났다. 투어가 끝나고, 가이드는 기억에 남는 작품을 한 번 더 보는 것을 추천했다. 오래도록 고민했다. 이집트관의 덴두르 신전, 강렬했던 우골리노와 아들들 조각상, 미국관의 아르테미스 동상,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등 다시 보고 싶은 작품이 많았다. 오랜 고민 끝에 결정한 건, 역시나 고흐였다.   


고흐의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을 보는 순간, 마음에서 작은 물결이 일어났다. 벽에 붙어 있는 다른 작품과는 달리, 자화상은 전시실 한가운데에 있는 유리장에 전시 중이었다. 가이드는 이 자화상의 진가를 뒷면을 봐야지만 알 수 있다며 사람들을 뒤로 안내했다. 뒷면에는 또 다른 작품이 그려져 있었다. 한 소녀가 빈곤자들의 주식이었던 감자를 깎고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 <감자 깎는 사람>이다. 밝은 자화상 대비해서 뒷면의 작품은 어두웠다. 고흐는 가난한 노동자에게 관심이 많았다. 2년간 광부와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삶을 직설적으로 그렸고, 노동자의 낡은 신발을 그리기도 했다. 특히, 거리에서 울고 있는 매춘부 시엔을 그린 <슬픔>은 보기만 해도 비참함이 느껴진다. 고흐는 매춘부 시엔과 그녀의 아들까지도 함께 살며, 시엔을 모델로 세우곤 했다. 아마 고흐 자신도 가난한 그림 노동자에 불과했기에 그들을 이해해보려고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고흐는 자화상 뒷면에 또 다른 작품을 그려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캔버스 살 돈도 부족했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가난한 사람을 그렸으리라 생각하고 싶진 않다. 빈곤자에게 자신의 뒷면을 내줄 정도로 이타적이고 따뜻한 사람이라고 오해하며, 오래도록 고흐의 자화상을 바라봤다. 가이드는 고흐에게로 다시 돌아온 나에게 말했다.      


“결국엔 고흐죠.”




사실, 메트로폴리탄에서 우연히 마주친 작가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에드워드 호퍼다. 여행 전, 여행자가 아닌 뉴요커로서의 삶이 궁금해 곽아람 작가의 <나의 뉴욕 수업>을 읽었다.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뉴욕에서 생활하며, 호퍼의 작품과 겹쳐 보이는 순간을 글로 썼다. 책에서 본 호퍼의 작품은 도심 속에서 느끼는 고독을 주제로 하듯, 인물에 표정이 딱히 없었다. 국내에서는 호퍼의 강렬한 원색 작품들이 인기가 많았다. 책을 통해, 호퍼와 친해진 나는 휘트니 미술관을 예약했다. 휘트니 미술관은 호퍼의 작품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었다. 초기 스케치부터 <The morning sun>, <New York Office> 등 유명한 그림들까지도 전시 중이었다.      

종일 걸어 다녀서 불난 발을 달래며 도착한 휘트니 미술관은 어이없게도 호퍼가 없었다. 알고 보니, 호퍼의 특별전이 한국에서 열려, 서울에 있다는 것이다. 정말 이럴 수가 있다니. 기껏 14시간을 날아왔는데, 떠나온 한국에 있다니…. 호퍼와 나는 인연이 맞지 않는다고 체념하며 휘트니 미술관을 아주 재미없게 둘러봤다.      

그러다 마지막 날, 메트폴로리탄에서 고흐를 뒤로하고 출구를 찾아 나서는 와중에 구석에서 호퍼의 큼지막한 그림을 발견했다. <Tables for Ladies>로 책에서 봤던 작품이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호퍼에게 와락 안길 뻔한 걸, 겨우 참았다. 구경하는 관람객에게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다 보네요, 호퍼.”     


호퍼와 내적 친밀감을 고흐만큼이나 쌓은 채로 메트로폴리탄을 나왔다. 호퍼와 고흐는 내가 뉴욕에서 친해진 예술가였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팟캐스트를 들으면 운동했던 어느 날이었다. 팟캐스트의 DJ가 <이번 달, 전시회>를 소개하며 에드워드 호퍼를 언급했다. 다른 DJ가 호퍼의 이름이 언급되자, 살짝 꺼리는 말투로 말했다.      


“호퍼의 전시회를 가도 되는지 잘 모르겠네요. 작품을 볼 때마다, 가정폭력의 호퍼가 생각날 것 같아요.”  

   

충격이었다. 뉴욕에서 그토록 반가워했던 호퍼는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예술가였다. 190cm에 100kg 가까운 거구였던 호퍼와는 반대로, 아내인 조는 145cm의 아담한 체구였다. 부부가 싸운 날에는 거구의 남편이 휘두르는 주먹과 폭행을 피할 수 없었다. 마루에 아내를 때려눕히곤 무릎으로 얼굴을 짓누르기도 하고, 두꺼운 주먹으로 얼굴을 때려, 조가 냉장고 위 선반에 머리를 부딪치기도 했다. 아내 조도 호퍼와 마찬가지로 화가였지만, 항상 남편의 모델이 되거나 밥을 차려야 했기에 그녀는 제대로 된 그림을 기회가 없었다. 아니다. 호퍼가 조의 기회를 뺐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다. 조가 그림 그리는 걸 싫어해서 조에게 기회가 올 때면 모두 그가 낚아채곤 말했다.     


“아무도 너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아.”  

   

도심 속 고독을 공감하면서 뚫어지게 봤던 호퍼의 그림 속 여인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모조리 아내 조라고 생각하자, 여인들의 알 수 없는 표정이 모두 고독이 아닌 비참함으로 읽혔다. 조를 액자 우리에 가둬두고 구경하는 중 한 명이 나라고 생각하자,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팟캐스트가 호퍼를 언급하며 던진 질문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작품을 작품으로만 바라보는 게 맞을지, 작품과 작가를 동시에 떠올리며 보는 게 맞을지. 지금도 사생활 논란으로 작품을 쉬거나 쉬었다가 나온 예술가와 연예인들이 많다. 미디어 속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사생활 기준의 격차가 아주 크다. 그래서 조금만 잘못하면 냉큼 반성문을 쓰거나 휴식기를 가졌다가 몇 개월이 지난 후, 슬그머니 얼굴을 내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다시 나오는 작품은 몰입하기 어렵다. 항상 그 사생활 속 한 장면이 오래도록 그들을 따라다니게 된다. 호퍼의 작품에서 더 이상 고독으로 몰입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DJ의 질문을 오래도록 곱씹다가 결국, 답을 내리기를 포기했다. 다만, 뉴욕의 예술가 친구 한 명을 잃었다는 건 확실하다. 

이전 21화 고흐는 천재가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