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드 보통의 ‘불안’을 읽고 나서
커리어 코칭, 결혼정보회사, 중고플랫폼 등으로 사람 간의 교류조차 자발적 움직임이 허용이 되지 않는다. 어려운 취업문과 근로환경으로 인해 중요한 인생의 타임라인은 서비스와 재화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는 기준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
언론은 매일 유명인들과 정치인들의 시시콜콜한 행보를 전하는데, 그런 같잖은 기사들이 눈앞에 놓여 있으니 어떻게 속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예인과 기업가들에 대한 관심을 조금이라도 버리고 대신 보통 사람들의 삶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더 초점을 맞추어만 준다면 지위에 대한 불만 또한 얼마나 많이 줄어들겠는가. - : 34p. 참고
자본과 과학기술을 부리는 능력으로 엄청난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계급 (현시대의 기업가들) 은 오직 부에만 관심을 가졌다. 감상을 배제하는 공리주의적 부르주아 계급은 직원을 탐욕스러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겼으며, 그들의 가족을 배려하지 않았고, 아픈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는 어린아이의 요구에 흔들리지 않았다.또 사람들은 대도시로 몰려들었으며, 이곳에서는 경쟁적이고 바쁜 분위기 때문에 이웃 간 정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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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인간 사이에 벌거벗은 자기 이익, 무정한 ‘현금 지불’ 외에 다른 아무런 유대도 남겨두지 않았다. 부르주아지는 종교적 열정, 기사도적 열의, 속물적인 감상주의의 드높은 환희를 이기적인 계산의 차가운 물에 담가버렸다. 부르주아지는 개인적 가치를 녹여 교환가치를 만들어냈다. - 139p. 인용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읽고 나면 우리가 사는 방법을 배우기도 전에 살아야만 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가 대단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우리 행동이 엄청난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잘못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이 무자비하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움과 슬픔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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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실패나 패배에 대한 단순화된 관점을 버리게 하고, 우리 본성의 풍토병과 같은 우둔과 일탈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자연은 나에게 ‘가난해지지 말라 ‘고 말하지 않았다. 또 ’ 부자가 돼라 ‘고 말하지도 않았다. 자연은 나에게 ’ 독립적으로 살라 ‘고 간청할 뿐이다.” _샹포르
근대의 성공적 삶이라는 이상은 돈과 선(善)을 연결시킬 뿐 아니라, 또 하나의 연결도 시도한다. 즉 돈과 행복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직업과 소비재가 실제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걸까? 장-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우리가 아무리 독립적 정신을 갖추고 있다 해도 자신의 요구를 이해하는 능력은 위험할 정도로 낮은 수준이라고 전제한다. 우리의 정신은 만족을 하려면 이런저런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외부의 목소리의 영향력에 민감하다. 이런 목소리는 우리의 영혼이 내는 작은 소리를 삼켜버리고, 긴요한 것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힘들고 까다로운 일을 방해할 수 있다. -259p.
빅토를 위고는 <에르나니 Hernani>(1830)의 서문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 규칙은 없다. 재능 있는 사람이 개인적 독창성을 포기한다는 것은 신이 하인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