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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정 Nov 24. 2024

북유럽의 평등과 한국의 근본적 차이

여성 평등에 대해 논하다

여성 평등 운동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아직 과도기적 시대를 살고 있는 듯 보인다. 동등한 교육을 받고 수능을 치러 실력을 겨루지만 서울에는 여러 개의 여자 대학교가 존재하며, 대기업 입사비율이 남녀 차이가 크지 않더라도 막상 10년 차 여성 직원들을 보면 파트장을 역임하고 있는 여성의 수는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승진 비중이 남성에 치우쳐 있으니 조금이나마 생활 수준에 보탬이 되는 월급 상승의 가능성이 있는 남편이 직장에 집중하고 여성은 과장급에서 안정적인 수익원이 있다면 육아 비중을 높이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남녀 구분할 거 없이 높은 업무 강도와 적은 휴무일 수, 잦은 야근이 크게 문제 되지 않는 문화에서 살고 있기에 한국 경제와 가정을 동시에 책임지는 건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이는 중소기업이나 불안정한 고용환경에서 종사하는 경우 더 문제가 심각한데, 우리 사회가 아직 남녀 임금 격차를 줄여가고 있는 실정이기에 대기업과 일반기업 간의 연봉 수준 격차가 극심하나 이에 대한 사회적 문제는 많이 언급되지 않는 듯하다.


다니는 학원 개수, 사는 동네, 높은 등록금 등 실질적 사회 불평등을 초래하는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평등적 대안은 마련하지 않은 채 성별의 차이라는 불변의 자연적인 분류를 물고 뜯고 싸우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우리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조차 구분하기 어려운 어른들로 인해 진리가 부재한 사회로 침전하고 있다. 스웨덴의 경우, 안정적인 대부분의 직장은 연간 휴가가 5주 정도 주어지고, 야근 문화나 경쟁이 심한 업무 분위기를 지양하기 때문에 동등한 육아 분담이 가능해진다. 이는 남녀 중에 누가 더 많이 육아를 전담하는지의 문제에 들어서기 전에 부모 양쪽 다 육아를 맡을만한 캐파가 가능한지의 질문이 더 중요한 것이다. 늦게까지 일에 치여서 퇴근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와서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는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육아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


또한 스웨덴은 가정주부라는 개념이 희미하기 때문에 여성들도 사회생활을 하는 동시에 아이를 케어할 수 있는 육아휴직이 충분히 주어지고 그 기간 동안 대부분 기존 급여만큼을 보장받을 수 있다. 아이는 나라가 키워내는 것이라는 대표적인 좋은 예이다. 우리는 부모가 얼마나 재산이 있는지, 상위 연봉자인지에 따라 아이들이 받을 수 있는 교육 수준도 천차만별이 되고, 마치 그들만의 경쟁 속에서 나름 치열했기에 특권층 자녀들마저 내가 이뤄낸 것이란 착각 속에 살게끔 한다. 높은 집값은 동네의 인프라 수준을 결정하고 학원이 몰려있는 곳으로 저녁마다 극심한 교통정체를 뚫고 아이들을 학원에 싣고 나른다. 정부의 빗나간 정책들로 인해 보이지 않는 사회적 계층을 형성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국가야말로 여성 평등의 책임 소지자이다. 20-30대 졸업생들은 아직도 물가에 비해 전혀 오르지 않은 연봉을 받으며 계약직, 인턴부터 시작해야 하고, 그마저도 서울에 초집중되어있어서 지방에 본가가 있는 학생들은 비싼 월세마저 감당하는 실정이다. 이렇게 어렵고도 지친 젊은 날을 이겨내고 있는 그들 또한 사회적 약자인데 여자만을 배려해라고 하는 건 쉽지 않은 동정표를 구하는 것이다.


유교문화에서 전승해 온 여러 가지 시험제도로 마치 누구나 입신양명할 수 있도록 평등한 기회를 주는 듯 보이지만, 시험 준비 기간에 소모되는 엄청난 비용에 대해선 국가는 좌시하고 있다. 부모의 재정적 부담으로 인한 노후 걱정, 학생들의 오랜 시험 준비 기간으로  어른으로서 성장할 다양한 경험의 부재 등으로 우리 사회는 당연히 출산율이 낮아지도록 의도한 거나 마찬가지라 생각된다. 아이를 기르고 책임감을 가지는 건 내가 그럴만한 시간적, 재정적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어른으로서 성장할만한 기회요인을 뺏어가면서 획일화된 시스템의 안정성을 누리며 아파트와 회사를 진자운동하듯이 반복하는 삶을 위해 긴 경쟁의 터널을 지나야 하는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실존주의를 생각하고 부모의 역할이 갖는 인생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겠는가?


물질은 넘쳐나지만 진리와 실체는 부재한 사회에서 새로운 단어들만 무작정 생성되어 마치 역할극처럼 여러 가지 형태의 평등에 대해 싸우고, 정전기처럼 짧고 미약하게 겉만 타격하는 그들의 ”불쾌감“에 대해서만 논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창조적 해결방안을 위해 어떤 행동을 펼쳐야 하는지 오리무중이 되기 쉽다. 이는 획일화된 경쟁 시스템에 최적화된 사회 특권계층이 진정한 지식인이 아니기에 변화의 조짐이 없는 것이며, 우리 스스로가 지식인이 되어 행동에 나서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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