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
연애 초반에 한국어 실력이 굉장히 어설펐던 M은 데이트마다 한국어를 어색하게 섞어가며 내가 잘못된 문장을 바로잡아주곤 했다. 그때 당시의 나는 바쁜 와중에도 서투른 한국어로 연락이 오면 카톡, 전화 할거 없이 틀린 문장을 바로잡아주고, 새로운 문법도 가르쳐주었던 열정은 꽤 칭찬받을만했던 거 같다. 나도 누군가에게 서투른 영어를 써가며 아기새처럼 모이 받아먹듯 새로운 단어를 곰곰이 기억해 두던 영국에서의 생활이 떠올라 애틋한 마음으로 가르쳐줬었는데..
영국 학부 시절 영국인 J를 만난 건 졸업반(penultimate year)에 막학기를 남겨두고 인턴쉽을 같이 하게 되면서이다. 3개월 간 부쩍 친해져서 회사에서 점심도 같이 챙겨 먹고, 퇴근 후엔 도서관에서 취업 준비를 하다가 늦게 귀가를 했던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처음엔 내가 점심시간마다 따라다니니 귀찮다는 표현을 마구 뿜어대서 민망했지만,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나도 커서 싫다는 친구 꽁무니를 쫓아다니다가 서로에 대해 얘기를 나누다 보니 많이 친해져 버렸다. 그 이후 7년간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꾸준히 안부를 전하곤 한다.
이렇듯 누군가에게 받은 선심과 좋은 기억은 타인에게도 여유롭게 베풀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그때의 나는 영어에 사로잡혀 해외에서 부단히 도 한 가지를 위해서 열심히 살았었다. 언어에 이토록 빠질 수 있었던 이유가 뭔지 돌이켜보면 서구 문화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영화와 드라마를 끊임없이 소비했었던 시절이다. 언어는 소통을 위한 단순한 도구이지만, 단어 하나를 습득할 때마다 내가 입 밖으로 내뱉으면서 마치 누군가인냥 원하는 모습으로 가장하는 (impersonate)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특정 문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언어 학습에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싶다.
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전공해서 시험마다 만점을 받았던 기억이 나지만, 현재 기억나는 단어는 하나도 없고 그저 증명 불가능한 자랑거리가 돼버렸다. 이후에 제2 외국어를 도전한 건 회사를 다니면서 점심시간 취미활동으로 시작한 프랑스어이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소설가, 철학가들의 작품을 언젠가 읽어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그리고 그 언어에 내재된 풍부한 역사와 감수성의 깊이가 느껴져서 매 수업마다 가는 길이 설레었던 거 같다. 다만, 현재는 현실적인 이유로 스웨덴어를 우선적으로 배워야 해서 정말 아쉽지만 잠시 뒤로 미뤄둔 상태이다.
한 달 전 스웨덴에서 2년 거주할 수 있는 비자가 나왔다. 8개월 간의 기다림 끝에 받아서 속 시원 하기도 하지만, 한국을 이제 떠날 날이 몇 주 안 남았다는 사실에 여러 불안과 걱정이 몰려와 요 며칠 잠을 설치곤 했다. 일에 치이고 출근길에 치여서 잠깐 동안 일탈을 위한 탈출구를 열심히 찾다 보니 이렇게 스웨덴이라는 종착역을 만나게 된듯하다. 오랜 보금자리였던 한국을 떠나 16시간 비행시간을 견디고 도착할 스톡홀름. 그곳에서의 삶에서 나는 어떤 의미를 추구하는가?
나에게 삶의 의미는 타인들과 가치 있는 연결성을 찾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건전하게 감정들을 공유하며 사는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스웨덴에 가서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가족, 친구들을 사귀면서 나는 더 큰 세상과 마주할 것이다. 서울에서는 오랫동안 쌓아온 인연들과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익숙한 문화 속에서 동질감을 느끼며 한국인으로서 체화된 경험들이 물 흘러가듯 편안한 일상을 안겨준다. 그러나 한동안 타지에선 나를 가면 속에서 잠시나마 숨기고 외부인들과 제2의 언어로 대화하며 그들의 문화를 가감 없이 이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이해라는 건 받아들인다는 의미보다는 왜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며, 어떻게 공통 관심사를 형성하고, 과연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를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퍼즐처럼 맞추어가는 것이다.
스웨덴 가족, 친구들과의 일상은 앞으로 꾸준히 기록하며 내 일상에 향신료와 같은 이국적이고 톡 쏘는 경험들을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아베 코보의 <타인의 얼굴>을 읽으면서 인상 깊은 글귀를 모아보았다.
"생각을 일시 중단시키고자 할 때는 자극적인 재즈를, 도약적인 탄력을 주고자 할 때는 이성적인 바르토크 (헝가리의 음악가)를, 존재감을 얻고자 할 때는 베토벤의 현악 4중주를, 한 가지에 집중하고자 할 때는 나선운동적인 모차르트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신의 균형을 필요로 할 때는 바흐를 듣는다."
"표정이라는 것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요컨대 타인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방정식 같은 것이죠. 자기 자신과 타인을 연결해 주는 통로 말입니다."
"유아심리학에서도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타인의 눈을 통해서만이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백치나 정신분열증 환자의 표정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통로를 막아둔 채로 있으면 결국에는 통로가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게 됩니다." -35p.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에 관한 소설은 흥미롭다. 보통 괴물이 접시를 깨면 그것은 괴물의 파괴 본능으로 간주하기 쉽지만, 이 작가는 반대로 접시가 깨지기 쉬운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괴물로서는 단지 고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뿐이었는데 희생자의 나약함이 어쩔 수 없이 그를 가해자로 만들어버린다. 다만 이 세상에서 깨지는 것, 부서지는 것, 타버리는 것, 피를 흘리는 것, 숨이 끊기는 것... 이러한 모든 행위가 존재하는 한, 괴물은 그 모든 것을 끝없이 계속 저지를 수밖에 없게 된다. 애초에 괴물의 행위에 발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이야말로 희생자들의 발명품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83p.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파괴당하길 거부하는 그 저항감의 강도일 것이다. 재현에 있어 어려움은 바로 아름다움의 정도를 가늠하는 척도다. 따라서 만약 대량 생산이 불가능하다면 얇은 판유리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임에 틀림없다."
"나 역시 타인의 얼굴에 걸맞은 타인의 마음을 만들어내려고 한 발짝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자신의 기호를 짓밟으면서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이 작업이 상상했던 것만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마치 가면에 가을을 부르는 힘이라도 있는 듯이 낡은 내 마음은 떨어지길 기다리는 마른 잎이 되어, 나는 아주 살짝 손으로 가볍게 나뭇가지를 흔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중략)... 자아라고 하는 녀석도 어쩌면 그리 운운할 정도로 대단한 것은 아닌 것 같다." -16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