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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나정 Sep 03. 2024

스웨덴인처럼 일-삶의 균형 찾아가기

서울 복귀 후 새로운 이직과 퇴사에 대한 기록

스웨덴에서 서울로 돌아오기 2주 전쯤부터 굉장한 불안감이 엄습했다. 파트너십 비자가 평균 19개월까지 걸릴 수 있기 때문에 24년 4월 퇴사 시점부터 월급이 끊긴 채 지내는 시간이 무한정 길어지게 될까 봐 전전긍긍한 것이다. 서울 본가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을 터, 결국 여러 지원 끝에 잠시라도 다닐만한 난민 후원을 모금하는 국제기구에 계약직으로 입사하게 된다.


합격 발표는 어느 순간이든 벅찬 감격과 짜릿함을 안겨준다. 적어도 연말까지는 일할 곳이 생겨서 기뻤던 순간도 잠시, 막상 일을 하려고 보니 생각보다 적응하는 게 쉽지 않았다.

국제기구와 한국 오피스라는 각각의 단점을 조합해 둔 집합체라고 말하기엔 너무 짧은 근무 기간이지만, 무엇보다 일을 만들어서 한다는 느낌에 억텐을 유지하면서 사수의 꼬투리를 참아내기가 쉽지 않기도 했다. 결국, 한 달 만에 퇴사를 결심하고 임시직을 갖기엔 내 상황과 마음의 여유가 여의치 않음을 인정했다.


스웨덴에서 돌아온 지 약 80일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서울에 돌아와서 직장생활을 겸한 지난 3개월간의 강한 여운을 글로 남기고자 한다.

퇴사의 주된 이유는 ‘일벌레가 되어야 한다’는 것과 정확한 업무 방향성에 대한 의견의 합치 없이 무조건적으로 작업을 하달받아서 해내느라 하루종일 피로한 눈과 욱신거리는 허리를 감내하는 고통의 결과가 꽤 높은 연봉일지라도 결국 내가 배우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일벌레라는 단어를 언급하는 이유는 무려 7시간 워크숍을 진행하고 나서도 오후 5시에 마친 워크숍을 근무시간이 9 to 6라는 이유로 한 시간 동안 의미 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길 바라는 관료주의 분위기와, 이틀간 진행한 워크숍의 14시간 분량의 회의 녹화본을 보고 회의록을 정리하라는 데 충격을 받았던 거 같다. 미리 회의록의 양식을 공유해주지 않고 끝나고 나서야 미봉책으로 ‘이런 일을 해야 한다’라고 지시하는 모습을 보니 국제기구 로컬오피스는 팀워크 역량 개발에 굉장히 취약한 환경이었다. 왜 이 일을 해야 하고, 일의 목적이 무엇인지, 회의록을 작성하거나 PPT를 만들어 내는 게 제일 효과적인 방법인지에 대한 후임자와의 의견 합치 과정을 진행하는 역량이 없다 보니 항상 명확한 가이드 없이 나 혼자 어찌어찌 일을 실컷 마무리해서 전달해 보면 새로운 방향으로 해보라는 피드백을 그제야 주는 행태였다.


그러고 보니, 이게 참 업무의 진행 방식도 한국 사회와 닮아있는 게 아닌가.


스웨덴 사람들은 업무 문화의 경향이 해야 할 일에 대해 같이 방향성을 설정하고 단계별로 완성도를 갖추며 의미 있는 작업을 추구하는 반면, 한국은 항상 바쁘게 돌아가고 일을 쳐내기 바쁘지만, 결국 낭비되는 자원과 직원에 대한 존중이 부족해서 주먹구구식의 업무 하달방식이 마치 자립하는 힘을 길러내는 스파르타 교육방법인양 홍보해 대는 듯하다.


여태까지 내가 한국의 경쟁사회에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쉬지 않는 캐릭터로서 대기업, 컨설팅, 국제기구까지 합격한 3관왕(?)의 기록을 이루어냈더라도, 결코 한국에서의 직장생활은 지속가능한 커리어 환경이 아님을 다시금 자각했다. 일에 치여서 눈이 어른거리는 증상이 생겨서 렌즈를 교체하러 안경점을 찾았더니, 안경사의 말이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수정체가 딱딱해져서 젊었을 때 안경 끼던 사람도 나이 들면서 멀리 있는 걸 더 잘 보게 돼요”라는 말을 듣자, 나이가 들수록 척추는 굳고, 수정체는 딱딱해지며 노년에 내 주변머리도 못 챙기는 상태가 일찍 도래하기를 바라는 거도 아닌데 왜 하루하루 모니터를 10시간씩 바라보며 살고 있는지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세상에서 태어나서 사회에 잘 적응해서 살아가보려던 좋은 의지로 달려왔던 삶이 결국 끝없는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잠시 동안의 휴식에도 갈팡질팡 못하는 모습은 저승의 귀신보다도 못하다고나 할까.


우리는 궁극적으로 안락한 삶과 가족의 안위를 위해서 열심히 달리고 있건만, 그 안락함이 내 품에 안기기 전에 몸이 굳어가는 노화의 시기에 접어들고 만다.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 즉 가족과 연인, 자식들을 나만큼 사랑하게 되면서 우리 자신을 안락함의 종착지와는 점점 멀어지는 고된 길을 행군하는 기분이다. 우리는 현대 사회의 틀에서 벗어나 하루라도 뇌의 작동을 잠시 멈추고 내 무의식의 세계에서 공상적인 꿈을 꾸며 자기 자신으로만 가득한 세상을 만끽해 볼 필요가 있다.


인생에서 우리는 어려움의 구멍에 빠지곤 한다. 인생이 가끔 너무나도 허무한 이유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태어난 환경과 주어진 재능에 따라 각자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며 고군분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의 노력을 헛되지 않게 뒷받침하는 게 사회의 안전성과 복지라고 생각된다.


끝없는 노동 끝에도 가족의 안식처를 제공할 수 없게 만든 부동산 정책과 극심한 경쟁구도로 모든 학생들에게 좌절함을 안겨주는 취업전선은 태풍의 본질에 대해 잊어버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혼돈의 현대 사회에서 태풍의 눈을 향해 질주하건만, 우리 중 대부분은 그 주변머리에서 바람에 치이고 부서지게 된다. 태풍의 눈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내가 그곳을 향하는 곳이 맞는지에 대한 질문은 전혀 없다. 내 일이 의미 있고 가치에 기여하는 일인지에 대한 방향성 없이 그저 연봉이 높고 안정적인 직장을 위해 달릴 뿐이다. 우리는 각개전투를 잠시 멈추고 가족과의 산책, 조용한 식사 등 진정성 있고 의미 있는 일에 몰두하는 시간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필요 없는 경쟁구도로 우리의 내면을 잠식시키는 사회구조를 비판하고, 유의미한 공공정책의 부재에 대해 항쟁함으로써 자유로운 사회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 열심히 살고 있건만 여전히 고뇌와 갇힘의 연속이라는 감정을 느낀다면, 그건 내 안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해야 한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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