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
요즘 내 삶은 굉장히 고요하다. 아침 6시쯤 눈을 떠 3살 된 강아지와 산책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나서, 강아지 발을 씻기고 눈곱을 떼어준 뒤 엄마와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빵 한 조각, 계란프라이, 그리고 샐러드에 발사믹 식초를 살짝 두른 뒤 플레이트에 옮겨 담는다. 아침식사 후엔 간단히 대화를 하거나 YouTube로 여행과 주택에서의 삶에 대한 영상을 시청하고 각자 방에 들어가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잠깐 들여다본다. 요가를 꾸준히 하고 있어서, 오전 수업이 있는 경우엔 요가를 한 시간 하고 나서 다시 점심을 먹기 위해 주방을 어슬렁 대다가 엄마가 불고기든, 게장국이든 맛있는 식사를 간단하게 한상차림 해주면, 남동생도 모여서 같이 점심 한 끼를 해결한다. 커피 한잔에 가족 간의 대화는 짧게 끝나기도 한 시간을 넘게 이어지기도 하는데, 주로 우리가 지향하고 싶은 슬로 라이프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지, 언제까지 도심 속에서 부동산 가격에 짓눌러 생계 고민만 하거나, 해마다 길어지는 여름의 푹푹 찌는 더위에 에어컨에 갇혀 실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해, 그리고 지옥철로 출퇴근에 맞춰 긴 줄을 서서 꽉 들어찬 지하철 칸에 몸을 구겨 넣고 하루의 10% 시간을 쓰는 게 합리적인 일인지에 대해서 토론하곤 한다.
우리는 꿈을 좇는 듯 열심히 살고 있지만, 앞으로 나에게 꿈은 생애에서 이룰 수 없다고 단정 짓고자 한다. 우리의 욕망이 완성되는 꿈이란 잠에서 형성되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이루어진다.
꿈이란 진정한 휴식과 내면의 안정을 통해 무의식을 돌보는 행위이며, 일상에 바쁘게 쫓기며 할 일을 쌓아가고 더 많은 내용을 머리에 집어넣고자 하는 게 아니다.
칼융의 무의식과 원형에 대한 책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은, 일상에서 질료가 되는 일련의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는 꿈의 소재를 쌓아가고, 이로서 무의식에 잠재된 반영은 꿈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우리는 바쁜 일상에 지쳐 달콤한 꿈을 방해하고 공상을 빼앗아 간다. 현재의 근로문화는 꿈의 생산 활동을 방해하고 의식적인 활동에만 몰두하여, 무의식의 영역은 점점 더 심연으로 잠식되거나 의식을 침범하는 형태의 정신병리적 형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본능과 지성의 차이는, 본능은 인간이 타고 태어났지만 살면서 기질을 발휘할 부분이 제한적이라 무의식의 너머로 숨어든 특징들이며, 지성은 물질 속에서 인간이 무리로 살아가기 위해 발명한 사회규범과 과학 기술이다. 그러나 우리는 점점 인간의 숨겨진 본능을 꺼내보기 어려운 사회로 나아가 내면을 공부하고 꿈을 접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나를 이루는 고유한 속성은 외부적인 물질사회가 반영해주지 못하기에 우리는 의식적인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더라도 그 불편한 감정이 지속적으로 나를 괴롭히게 된다. 지성에 대한 무한한 숭배로 억압당한 본능은 현실의 물질화된 세계에서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개념을 잊어버리게 함으로써 인간적인 삶의 추구를 방해한다. 디지털 콘텐츠와 신문 뉴스거리는 우리가 가지는 본능의 욕망을 투영하는 매개체이지만, 이는 각 개인의 고유함을 인정하고 자신이 돌보아야 하는 내면의 중요성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내면을 가꾸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있을까?
일상에서 벗어나 상념을 멈추고 영혼의 힘에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은 요가이다. 요가를 하면 내 몸에 갇혀있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기분이다. 내 몸이 가장 불편해하는 자세를 균일한 호흡으로 유지하면서 흔들리는 신체의 균형을 잡기 위해 평정심을 유지하는 힘을 기르게 해 준다. 몸의 가장 얇은 부위인 팔과 다리로 온몸을 지탱하는 자세를 연습하면 주어진 몸의 한계를 벗어나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동물의 형상과 닮아 있어서 비둘기자세, 엎드린 악어자세, 고양이, 소자세 등으로 불리는 형상을 만들어내려면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배가 조이며, 햄스트링이 찢어지는 고통도 느끼지만, 몸이 균형을 찾아가고 안정된 호흡을 구가함으로써 신체에 속박된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해 준다. 이처럼 요가는 아무 도구 없이 내 몸의 최대치를 끌어올리며 손가락, 발끝하나도 쉬지 않고 몸 전체를 이어지는 하나의 끝으로 팽팽한 줄달리기를 하는 모습니다.
우리가 시작된 태어난 모습처럼 내 몸에만 의지하여 아사나(자세)를 만들어내는 요가는 끊임없이 들어오는 상념들을 차단하고 오롯이 요가에만 집중한 후에 마지막 휴식자세를 맞이하면, 작가가 긴 수필을 쓰고 탈고 후 맞이하는 고통에서의 해방감과도 맞먹는다. 요가의 플로우를 이어가며 마지막 동작까지 완수하는 기쁨이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는 모든 것을 비운 상태로 되돌아가는 순간 진정한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 언급되는 슬픔의 관념을 생각하다, 불특정 살인행위와 같이 평소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지 않은 사람에게 이유 없이 해를 가하고자 하는 분노는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살인자는 그의 강화된 슬픔에서 비롯된 분노의 감정을 공유할 비특정 상대방을 찾아 죽이는 과정을 통해 죽임을 당하는 피해자의 슬픔으로 동화되기를 바란다. 그 자신의 분노의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인간 개체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동질감, 즉 모방의 감정을 느끼기 위해 내가 동일시하는 유사한 개체, 즉 타인이 나와 같은 슬픔을 느끼기를 바라면서.
인간은 '신'의 일부로서 유사한 속성을 공유하고 있는 개체라는 공통점을 상기하며 살아간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과의 동질성을 느끼며 신과 연결된 느낌을 더욱 강하게 느끼는 것이다. 사람의 감정은 전염되며 내 기쁨이 많은 주변인의 슬픔을 야기한다면 나도 그 슬픔에 전념될 것이다. 또한 슬픔 또는 미움에 대한 감정과 모방은 더 큰 효과를 가지기 때문에 기쁨에 대한 관념을 소멸시킬 수 있다.
이처럼 불평등은 더 많은 사람들로부터 슬픔의 관념을 생성시키고 우리 사회도 그러한 슬픔이 강화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와 시달리고 있다.
'긍휼'이라는 개념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나보다 어려운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한 개체들을 향한 부러움과 동경에 더 쉽게 휩싸이고 만다. 물질에 구속된 인간의 대표적인 형태로서 아이돌의 이미지와 과잉 소비를 자극하는 서비스 산업 - 결혼정보회사, 커리어코칭 등-이 경제에서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람들의 성공과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은 극단적인 물질화로 집중되고, 이러한 사회에서 이질감을 느끼며 순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겐 타인과의 연결성을 이어질 주제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규격화된 성공에 대한 척도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없는 수용으로 극단적인 동질성과 자본주의사회 중심의 계층 간 질서가 확립되면서 우리 각자는 인간개체의 변주된 다양한 양태로서 내면의 고유의 속성을 들여다보고 능동적으로 역량 발전을 이끌어내는 창발성을 발휘하는 힘을 잃어가도록 사회의 부조리함이 극치를 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