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을 보고 감동하는 건 도시인들이며 자연에 사는 이들은 그에 익숙하다.
하이데거는 베를린 교수 초빙 제안을 거절하고 평생을 시골에서 지내며 집필에 몰두했다. 그는 자연을 잠깐 즐기러 나온 도시인들에게 아름다운 풍경은 감동거리이지만 자연 속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에겐 그저 익숙한 것이라 얘기한다. 자연에 동화되고 자연이 삶의 이유를 대부분 설명해 주는 곳이 북유럽의 스웨덴이다. 철학적인 삶의 근본에는 자연(피시스)이 있고 존재에 대한 질문은 그에 다가갈수록 인간의 논리로 분석하거나 접근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일까? 스웨덴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철학자는 거의 없지만 개인의 삶을 지켜보면 이미 많은 이들이 삶의 균형을 찾아 숲에서 개인의 Sommarstuga에 은거하며 여름을 보내고 주말엔 자연친화적인 활동을 통해 존재성을 회복하는 방법에 익숙해 보인다.
스웨덴에선 영혼을 회복하는 일이 서울보다 좀 더 수월해진다. 이들에겐 집이라는 안식처와 조금 더 넓은 의미의 자연을 돌보는 활동이 내 삶의 울타리가 되고 존재의 참모습을 되찾는 과정을 반복하며 자연스러운 순환 과정을 형성한다.
최근에 결혼식을 앞두고 준비할 일이 많아지다 보니 혼인신고 서류도 작성하고 현재 지내고 있는 아파트가 협소해서 조금 더 넓은 공간도 찾으러 다니면서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우리의 삶은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하기엔 수많은 증명서와 계약서, 명세서 등이 우리의 정신을 물질화시키는 걸 가속화한다고 느껴졌다. 아베 코보의 “타인의 얼굴”이라는 소설 속의 대사처럼 우리는 이러한 서류 작업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증명하지만 결국 주인공의 잃어버린 얼굴을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전혀 다른 타인의 얼굴을 이어 붙인 모습으로 나타나도 나의 본질을 알고 있는 건 나와 시간을 나누고 인생을 같이한 아내만이 내 존재를 꿰뚫고 있으며 나를 찾는 방법임을 알게 되는 결말이다. 직업, 주소, 재산, 이름마저 우리가 태어나면서 많은 이름표를 붙여가고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듯이 나를 복합적이고 고차원적인 인간으로 성장시키려고 노력하지만 대부분은 대기업의 매출이든, 병원의 환자 수이든 자신을 위한 일도 아니며 타인을 위한 일인지도 의문인 이 물질성으로 거대화된 세상에 뭔가 덧칠을 하며 색깔을 입히고 고부가 산업의 덩치를 키우는 데에 일조할 뿐이다. 코스모스, 즉 우주의 조화를 이해하고 별의 반짝이는 아름다운에 대해 감상하는 존재로서의 본질을 쉽게 잃어버리게 만드는 환경이다. 환경이라 하면 내가 가장 편하고 나다운 존재로 살아가기에 적합한 나를 둘러싼 에너지로 이해되어야 하지만 현재 우리를 둘러싼 환경은 산업에 지배되고 가속화되는 발전의 시류에 떠밀리듯 살아가게 되면서 결국 우리에게 남은 건 집 평수, 새로 장만한 자동차 등 물질이 물질을 낳는 대화가 전부이며, 우리 삶이 단순히 공장 컨베이어 벨트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물건으로 비친다. 우리는 좀 더 예측하기 어렵고 다채로워져야 한다. 그렇다고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고 세상에 반대되는 특별한 곳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단순하고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본연의 모습이 사랑할만한 창조적인 자연 속에 우리를 풀어두는 시간이 필요하다. 조금 더 길게 자연에 머물고 그와 동화되기 위해 풀이름을 익히거나 물의 흐름을 관찰하고 선선한 바람에 손끝이 살짝 저리는 기분을 다시금 되찾아야 한다. 에어컨과 향수 냄새에 익숙한 도시인들은 나를 포함한 다른 이들의 삶도 황폐화시키는 책임이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단순히 생각해 보면 세상에 기투된 존재로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끝맺음을 통해 삶의 본질을 다시 일깨운다. 대부분의 우리는 제한된 시간 속에서 무언가 이루어야 한다는 거창한 꿈이라기보다 그저 나를 위해 편안한 마음으로 남들과 어울리며 적당히 삶의 패턴을 읽어나가는 여린 존재일 뿐이다. 다만, 존재 질문에 대해 물질적인 결론에 이른 극소수의 소위 말하는 논리적 부류로 인해 더 많은 성과와 발전을 도모하는 게 존재가치의 증명이라는 선전활동과 교육의 잘못된 방향성으로 형성된 최종 무대인 사회에서 생산활동인구로서 느끼는 불안함과 압박으로 인해 우리는 삶의 기본적인 행복 욕구조차 채우는 게 그리 쉽진 않다. 편안함, 즉 배고프지 않고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사랑하는 가족과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란 주체적인 것일 때 더 빛난다. 세상을 연습장으로 여러 시도를 해보며 즐거운 도전을 이어나가라는 말을 하기엔 사회가 부여한 책임과 규율이 너무 많지만, 그럼에도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하늘도 내 것이고, 바다도 내 것인데 왜 내게 주어진 시간은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며 우리가 시간을 바치며 얻는 물질과 돈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욕망을 무한정 받아들이는 것에만 익숙해져 물질의 집착으로 타락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미래를 향한 질문이라기보다 과거에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세상과 비교해서 나의 현존재가 망각하고 있는 시간의 수치적 한계를 넘어선 초월적인 존재의 질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시대적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고 물질의 편리함을 예찬하는 것은 타인의 눈과 현시대의 거울을 통해 바라본 나의 모습일 뿐이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은 내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고, 일상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그 시작점이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는 것은 배 위의 내 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다를 일정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는 세상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힘이듯이 이 세상을 관통하는 날카로운 사고와 예민한 감정이 우리의 살아있는 감각을 일깨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