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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식재료와 장보기 문화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에서 묘사하는 일상에 대해

by 시에나정

요즘은 스웨덴의 culinary experience를 가질 마땅한 기회가 없다 보니 하루도 빠짐없이 집밥을 해 먹었다.

점심 도시락을 싸달라는 약혼자 M의 요청으로 하루에 다루는 재료의 양도 많이 늘어나다 보니 마트를 하루에 한 번은 꼭 가야 한다. 집 근처 걸어서 5분 거리에 스웨덴에서 꽤 큰 마트 체인인 ICA와 Coop이 있어서 장 보는 건 어렵지 않은데, 배달이 안되다 보니 한 번에 많은 양을 사진 못한다.

서울에선 쿠팡과 동네 농협마트에서 주문하거나 장본 뒤 배달 서비스를 쉽게 받을 수 있었는데 여기선 배달을 받는 서비스가 접근성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배달원의 방문 시간에 맞춰서 집에 없다면 다시 물건을 회수해 가기 때문에 대부분 근처 공용 물품 보관소나 우체국에 맡겨서 픽업하는 형태이다.


배달이 안 되는 건 여러모로 불편하지만 매일매일 내가 필요한 재료들을 냉장고에서 체크하고 한두 개씩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오는 건 일상에 꽤 큰 즐거움이라 여겨진다.

예전에는 바나나와 망고가 이렇게 무거운 줄 몰랐는데 내 배속으로 꼭꼭 담아낸 음식들이 정말 머나먼 여행을 원산지로부터 출발해서 내 주방까지 도착하는 마지막 순간의 logistics 까지도 이렇게 나의 두 팔과 코어 에너지가 십분 든다는 걸 느끼면 음식에 대한 소중한 감정이 요리에 담기게 된다.

Hötorgetshallen (Google)

주요 재료는 마트에서 대체로 구할 수 있기 때문에 가끔 좋은 부위의 고기나 불고기 재료로 얇게 저민 소고기를 사기 위해서 시내 중심가에 있는 Hötorgetshallen에 가는데, 이곳에는 건물 안에 다양한 식료품점이 자리 잡고 있고 스웨덴 산지의 재료들을 좋은 품질로 구할 수 있다. 마트에서 플라스틱 비닐에 담긴 고기들보다는 좀 더 신선하지 않을까 해서 가끔 레스토랑 가고 싶은 기분을 내려면 이곳에서 스테이크 부위도 구매한다.


북유럽은 레스토랑 음식이 굉장히 비싸고 맛도 집에서 먹는 거보다 비교안되게 맛있는 곳이 드물어서 외식 비용은 최소한으로 줄이는 대신 식재료를 마음껏 사서 건강하게 먹는 데에 초점을 둔다. 학창시절 런던에서도 마찬가지로 유럽 살이에서 외식 비용까지 생각하면 월급이 한참 모자란 느낌이고 타이나 인도식 레스토랑에서 치킨 팟타이나 카레를 먹는 비용으로 집에서 등심을 구워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외식 메리트도 점점 없어지는 거 같다. 운동을 꾸준히 하고 미래를 위한 체력을 다지고 싶은 사람들에겐 단백질 함량과 칼로리가 더 중요해지고 내 신체건강이 정신 건강과도 직결됨을 체감하게 된다.

내 몸은 정신의 집이라는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면서 겉치레와 인테리어에 너무 많은 신경과 노고를 들이는 대신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하고 정신의 맑은 상태를 위한 운동과 독서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게 도움이 된다.


최근에 읽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 연대기“는 총 3부작으로 이루어진 소설인데, 이 주인공 남자는 변호사 자격증 없이 보조 사무원으로 변변찮게 일하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가사를 하면서 부인을 하루 종일 기다리며 일상을 보낸다. 그렇지만 그의 생각은 점점 짙어지고 과거의 기억 속에 남겨진 대화과 인간관계에 대한 날카로운 감정들은 살아 숨 쉬듯 남자를 괴롭히기도 한다. 이처럼 평화롭고 하릴없는 일상의 와중에도 우리는 강렬한 감정과 혹독한 실존적 의문을 다루는 인간의 숙명을 가지고 산다.

줄거리 중반부에는 남자의 아내가 그를 떠나 행방불명이 되고 이로서 남자에게 일어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스토리가 전개되면서 그의 인생은 이제까지 아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는 자괴감을 파괴하기 위해서 깊은 우물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체험을 하게 된다.


아침에 토스트를 구워 잼을 바르고 저녁에 닭고기를 노릇하게 구워 야채와 간장을 곁들여 배우자와 먹는 행복을 매일 경험했더라도 배우자의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 이러한 행복한 기억들은 전부 사라지게 된다. 이처럼 인간은 가장 소중한 인간관계에서 본인의 존재감이 바닥난 순간 각자의 고독에 갇혀 이 우물 속으로 기어 들어가게 된다.


나도 하루하루 정갈하게 재료를 다듬고 저녁을 요리하면서 마음의 안식을 찾더라도 어느 순간 어둠이 몰려오면 고통에 해방되기까지 끝없이 잠만 자고 끊임없이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기분을 느낀다. 이건 인간으로서 가지는 자연스러운 고통인지 언젠가 해소될 수 있는 괴로움인지에 대해서도 불분명할 때가 많다. 이럴 땐 우물로 들어가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고 숨겨진 실마리를 과거에서 찾아내야 한다. 인간은 나 자신을 본인의 의식을 통해서만 이해하기에 온전한 내가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숙명이다. 의식 속에서 많은 일을 벌이고 쉼 없이 달리지만 우리는 하루키 소설에서 표현되는 우물처럼 무의식의 세계로 잠수함으로서 의식으로 이해하는 내가 보지 못한 무의식의 나를 마주치게 된다.

우물처럼 죽음과 가까운 곳에서 다시 환생하듯 깨어나 일상으로 회귀하는 것, 이게 인간의 인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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