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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다스타 Jan 07. 2024

서른 살에 일본어를 배우는 이유

덕질은 죽어도 못하는 타입

작년 겨울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일본어 수업을 듣는다. 선생님은 스물세 살의 귀여운 사촌동생 같은 이미지의 여성이다. 시간을 묻는 것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문법을 배우고 단어를 익혀 지금은 선생님과 일본어로 약간의 대화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원래는 캐내디언 남편이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 찾은 튜터링 사이트였는데 나도 거기서 인사이트를 얻어 일본어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대학교 때 독일어를 전공했지만 커리어는 영어 교육 쪽으로 쌓곤 했었다. 독일에서 만난 동유럽 전 남자 친구 덕에 폴란드 언어도 조금 배워보고, 중국어가 취업 시장에 큰 경쟁력이 된다는 말을 듣고 중국어도 도전해 본 적이 있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외국어에 재능이 있다고들 하지만 정말 재능이 있었으면 지금쯤 7개 국어로 국제회의가 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재능보다는 약간의 관심과 의무감으로 언어를 배웠던 것 같다. 일본어는 그런 점에서 순전히 내가 원하고 내가 열정을 담아 공부하는 첫 언어이기 때문에 조금 더 특별한 느낌이 든다.


한국에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았으면 알겠지만 난 남들과 같이 중고등학교 때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운 적이 있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후 히라가나 읽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때는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틀어주는 '노다메 칸타빌레'나 '기묘한 이야기'를 보며 행복하게 시간을 때웠던 게 다였다. 그렇게 허접했던 내가 어떻게 서른 살이 되고 나서야 일본어에 이렇게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그 시발점은 존재한다. 나에겐 바로 "퍼스트 러브 하츠 코이"라는 일본 드라마가 그것이다. 넷플릭스에서 첫 공개가 된 지 벌써 1년이 되었지만 난 한참 후에 그 드라마를 접했다. 음악을 들을 때도 K-POP 일본어 버전이 나오면 바로바로 넘겨버렸던 내가 9회 차 밖에 없는 짤막한 로맨스 드라마 하나로 이렇게 관심이 바뀌어 버렸다. 하츠 코이는 단번에 나의 인생 드라마로 등극했고, 일본어를 왜 배우냐는 질문의 답이 되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진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일본의 예능 쇼 (Love Village, Terrace House 시리즈, Love is Blind in Japan)를 찾아서 보게 되고 나의 두 귀는 그들의 언어가 더 친근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내가 재미있게 봤던 예능은 보통 대본이 없는 남녀의 관찰 예능인데 우리나라로 따지면 솔로 지옥 시리즈 같은 것들이다. 여러 쇼를 보면서 일본의 삶이 한국의 삶과 지나치게 닮아있으면서도 그들의 생활양식과 문화는 매우 상반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최근에 보기 시작한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취업에 실패한 주인공이 계약 결혼을 하여 풀타임 하우스키퍼가 되는 이야기이다. 드라마의 설정은 정말 비현실적이지만, 대학원까지 졸업한 주인공의 취업난과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해고당한 이야기 등 등장인물들이 처한 환경이 우리나라와 정말 비슷한 느낌을 많이 준다. 하지만 예능 속 일본인의 행동 양식을 보면 역시나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다른 스타일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사람 사이의 갈등을 최대한 피하려고 하고 자기의 속마음을 말하기 조금 어려워하는 등의 모습을 예로 들 수 있다. 언어를 배우고 영상매체를 접하며 이렇게도 가까운 이 두 나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계속해서 발견해 나가는 과정이 참으로 재미있다.


나의 니홍고 센세이 '린나'는 한국어도 참 잘한다. 5 년을 만난 남자친구가 한국인이기도 하고, 한국 드라마와 음악을 즐겨 듣는 것 같다. 린나는 내가 대학생 때까지 즐겨 듣던 음악 앱 melon을 아직도 사용하며 심지어 노트북 언어 설정도 한국어로 되어있다. 나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지만 일본어를 똑 부러지게 가르치고, 시간이 남을 땐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며 도란도란 수다도 떠니 난 나의 일본어 수업이 항상 기다려진다. 최근에는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위하여 문법책과 한자 책도 샀다. 선생님이 알려주시는 단어는 매번 적어놓아도 까먹지만 난 지금까지 잔잔하게 타오르는 이 열정이 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빨리 끓어오른 물은 빠르게 식는다고 하지만 나는 아주 얇고 오래 마지막까지 남는 장작의 불씨처럼 내 마음을 오래 가져가고 싶다.


내가 일본어를 배운다고 커밍아웃하면 주변의 반응은 보통은 긍정적이다. '열심히 잘해봐!' 하며 어떤 친구는 자신이 예전에 쓰던 일본어책도 주며 나를 응원해 줬다. 그리고 생각보다 주변에 일본어 고수들이 많다. 이웃나라의 언어라 그런가 찐 고수들이 여기저기 "숨어있다" (대놓고 있진 않음). 특히 애니 덕후들이 나를 어둠의 길로 인도하려고 할 때도 있다 (린나 선생님도 살짝). 성격상 덕질은 정말 못하지만 주변에 나를 응원해 주고 나와 관심사가 같은 친구들이 많이 있다니 참 안심이다. 성실하게 공부하여 2024년의 끝자락이 될 때쯤 번역기 없이 일본 여행을 한번 가보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먼 나라 캐나다에 정착하고 나서 생긴 관심이라 과거 10만 원이면 일본에 갈 수 있던 때가 조금 그립긴 하다만, 분명 그때의 여행과 일본을 알고 난 후의 여행은 하늘과 땅차이일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배움은 늘 새롭고 재미있다. 항상 긍정적이고 겸손한 자세로 일본어를 쭉 공부해야겠다. 린나 센세이 아리가또! (๑˃̵ᴗ˂̵)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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