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에세이: memory, remember, music, museum
툭, 툭, 툭, 퍽, 탁, 땡, 그리고 정적. 잠시 후 아들이 고개를 숙이고 방문을 열고 들어온다. 고개 숙인 아들을 보고 잠시 소리의 정체를 상상했다. 내 상상이 제발 맞지 않기를.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에는 무언의 뭔가가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나의 상상이 빗나간 경우가 별로 없다.
“아빠 ….”
“깼구나?”
“응.”
“후 … 그러게 거실에서 공놀이 하지 말라고 했잖아.”
“미안해, 아빠 …”
거실에 나가 보니 내가 아끼던 도자기 찻잔이 세 동강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잠깐 사이에 어떻게 하든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했던 아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작은 부스러기가 한 곳에 있고, 깨진 조각들을 레고 맞추든 맞춰보려고 했던지 조각들이 모여 있었다.
도자기 공부를 시작한 지 9년이 되었다. 그동안 만든 도자기 수보다 깨진 도자기 수가 더 많을 정도로 도자기 공부는 수없이 많은 삶의 파편들을 만들어 냈다. 기다란 수염을 기른 도사 같은 할아버지가 도자기를 가마에서 꺼내서 망치로 깨 버리는, 있어 보이는 장면은 한 번도 연출해 보지 못했다. 마르다가 갈라지고, 초벌구이에서 터지고, 재벌구이에서 또 갈라졌다. 최종적으로 무사히 나왔다 하더라도 뜨거운 온도에 모양이 일그러지는 건 다반사다. 초보자였던 시절, 깨져 나온 도자기를 볼 때마다 마음이 무너졌다.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을 때의 심정과 비슷하다. 남들한테는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다고 하지만 속은 그게 아니지. 그런데 이런 게 반복될수록 어떻게 저 할아버지가 망치를 들고 도자기를 가볍게 깰 수 있는지 이해되기 시작했다. 도자기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만드는 것이라는 걸, 깨지고 부서지는 도자기 앞에서 깨닫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으로 도자기가 깨져 나갈 수 있다는 건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경험이었다.
작년에 나의 도자기 스승님이 지역 예술 축제에 출품을 하신다고 같이 작품을 내보라고 하셨다. 몇점 추천을 받아 내놓긴 했지만, 이것만은 좀 안 내놨으면 하는 것이 있었다. 계획해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작년 가을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잠시 쉬려고 앉았는데, 쓰다 만 도예 흙이 눈앞에 있었고, 손이 저절로 갔다. 손가락으로 주물럭거리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감정은 강물을 타고 흘러가는 듯했다. 목적지도, 방향감각도 없었다. 어느정도 완성됐다 싶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밖은 이미 해가 져서 깜깜했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지 모른다는 게 이런 거구나. 귀신에 홀린 듯이 시간이 나를 잡아먹고 있었다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처음 생각과는 전혀 다른 모양의 찻잔이 만들어져 있었다. 마법에 걸린 듯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찻잔은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은 묘한 감정이 일어났다.
하지만 스승님은 이 찻잔이 마음에 든다며 꼭 출품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혹시 누군가가 마음에 든다고 사가면 어쩔까 싶어 터무니없는 비싼 값을 매겨서 내놓기로 했다. 전시 중에 간간이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작품에 관심을 보이며 칭찬을 해주셨다. 하지만 가격도 가격이고 그다지 실용성이 없는 찻잔이라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그저 우리 집 거실, 잘 보이는 곳에 놓고 내 추억을 곱씹는 용도로 충분했던 것이다. 무아지경의 행복한 순간을 담은 잔으로.
하지만 이제 그 무아지경의 황홀함이 엎질러졌다. 그것도 사랑하는 아들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놀이를 하다 깼으니, 뭐라 할 말도 없었다. 아들에게는 다치지 않게 잘 버리고, 청소를 깔끔히 해 놓으라고 말하고는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문밖을 나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그놈의 흙덩어리가 뭐라고 ….’라는 말을 되뇌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흠칫 마음을 찌르는 말이 생각났다. ‘저놈의 돌덩이가 뭐라고 ….’라는 말. 이 말은 내가 우리 아들만 한 나이 때 아버지를 보고 되뇌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마당 가꾸는 일을 무척 좋아하셨다. 그 덕에 봄에는 마당에 이름 모를 꽃들이 풍성하게 피었고, 여름에는 화초 잎이 싱그럽게 칼날처럼 반짝였다. 주말에 어디를 다녀오시면 꼭 팔뚝만 한 돌을 가지고 오셨다. 아버지는 돌을 화초 오른쪽에 두었다가 왼쪽에 두었다가 하시면서 무슨 작품을 만들듯 그윽한 미소를 지으셨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돌이 마당이 아니라 거실까지 진입했다.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 집안에 왜 돌을 들이냐고 뭐라 하셨다. 지금은 좀 생각이 달라졌지만, 어린 시절, 두 분이 다투시면 나는 거의 백 퍼센트, 어머니 편이었다. 그러니 거실에 놓인 돌을 볼 때마다 그 말을 되뇌었던 것이다. ‘저놈의 돌덩이가 뭐라고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모님이 어느 날 내게 하신 말이 생각난다.
“너희 아버지가 참 낭만적이고 감성이 풍부하셨는데 ….”
그러고 보니 살아생전 아버지가 텔레비전을 보시다가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한국의 겨울을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었다. 눈이 펄펄 내리는 시골 풍경을 보시다가 돌연 날 보시더니, “저거 참 아름답지 않니?”라고 하셨다. 아마도 아버지는 거실에 있는 돌을 보시면서 여행지의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하셨지 않았을까 싶다. 그 돌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감정의 순간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느꼈을 무아지경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을 이제야 깨닫다니. 갑자기 한숨이 나오면서 미안한 마음과 보고 싶은 그리움이 뒤섞여 올라왔다.
거실에 놓여 있던 ‘그놈의 흙덩어리’와 ‘그놈의 돌덩어리’는 나와 아버지의 ‘그때의 기억, 그때의 감정’을 오롯이 품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언제나 버튼을 누르면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시디(CD)나 엠피스리(MP3) 파일처럼, 눈으로 그 자리에 있는 그것을 보는 순간,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영화처럼 흘러나오는 것이다.
영어로 souvenir, 혹은 memento라는 단어가 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기념품이라는 뜻이다. 보통 기념품이라고 하면 여행지에서 사 오는 단순한 물건 정도로 생각되지만, 단어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면 물건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럼, 무엇이 중요할까? 이 단어의 어원을 먼저 살펴볼까?
souvenir는 직접적으로 프랑스어에서 유래된 말인데, 라틴어 어원에 따르면 ‘깊은 곳에서 떠오른 생각’을 뜻한다. memento는 고대어에서 생각한다는 뜻의 ‘men-’에서 나온 말이다. 우리가 기억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는 memory, 기억한다는 뜻의 remember도 모두 여기서 유래되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가끔 듣는데, 모리(mori)는 고대어에서 죽음을 뜻한다. 그러니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고대 로마에서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 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이 말을 외치게 해서 승리에 도취하지 말도록 했다는 것으로도 유명하고, 르네상스 이후 서양 미술계에서는 메멘토 모리의 대표적인 상징물인 해골을 작품 여기저기에 그려 넣는 것이 유행이기도 했다. 어쨌든, 메멘토라는 단어는 오늘날 기념품이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이 말의 핵심은 바로 ‘생각’이고, 결국 기념품이란 “생각하게 해주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돌하르방 인형을 제주도에서 샀다면 그 인형을 보면서 제주도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서울에서 샀다면 제주도가 생각나는 건 아닐 것이다.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도 사람처럼 ‘생각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만, 생각이라는 것을 빼놓는다면 인간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래서 그런지 음악의 music도, 박물관의 museum도 모두 생각한다는 뜻의 ‘men-’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니 음악은 우리 인간을 생각하는 존재로 만들어 주는 예술이고, 박물관이란 인류의 조상을, 그들의 생활과 문화를, 인류의 역사와 발전을, 그리고 우리가 속한 우주를, 그러니 세상의 모든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또 다른 작은 우주이다.
얼마 전, 가족들과 강원도에 있는 천문대를 다녀왔다. 어린 시절, 시골 할머니 댁에서 보았던 보석 같은 밤하늘이 뇌리에 박힌 후, 늘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동경해 왔다. 그래서 인지 천문대에 가는 며칠 전부터 설레었다. 미약한 인간이지만 거대한 우주 어느 곳을 좀 더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떨리고 또 떨렸던 첫 연애 같은 느낌이었다. 달과 목성, 오리온자리 성운, 큰개자리 산개성단을 만나고 내려오는 자리에서 나는 기념품을 사자고 고집을 부렸다. 아내는 그걸 뭐에 쓸려고 하냐며 시큰둥했지만, 나는 그 떨리는 마음을 어딘가에라도 담아 가고 싶었다. 기념품은 천 원대부터 십만 원대까지 다양했지만, 물건이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천문대 모양의 작은 자석을 하나 샀다. 오늘도 냉장고 문, 제일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둔 천문대를 보고 집을 나왔다. 볼 때마다 마음이 설렌다. 아들이 아무리 공놀이를 해도 이것만큼은 깰 수 없겠다는 마음의 편안함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