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에세이: story
눈이 오면 온통 하얀색으로 덮인 운동장을 도화지 삼아, 친구들과 눈을 뭉쳐 굴리며 그림을 그렸다. 눈 한 뭉치를 주먹에 쥐고 꼭꼭 누른 다음, 눈 위에 굴리기 시작하면 눈덩이가 점점 커지고, 친구들은 누가 먼저 더 크게 눈을 뭉치는지 경쟁하며 운동장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가장 큰 눈덩이가 정해지면 그다음으로 큰 것을 옮겨다가 함께 들어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다음 큰 눈덩이, 또 그다음 눈덩이…. 그렇게 우리는 눈사람 가족을 이곳저곳에 만들었다. 하얀색 운동장은 이렇게 여기저기 길이 났고, 길모퉁이에는 눈사람 가족이 생겨났다. 그 작품이 너무나 소중했기에, 우리는 추운 날씨가 이어지기를 바라며, 다음 날 아침 약속이나 한 듯 운동장에 다시 모였다.
자연이 만든 모든 것은 작은 점에서 시작한다는 걸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우주 만물의 원리를 배운다는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도 세상의 원리는 둘째치고 복잡해 보이는 계산식에 진저리를 낸 것이 다였다. 그러던 내가 우리 집 어린 꼬마에게 처음으로 눈사람 만들기를 가르쳐 주면서 그걸 깨달았던 것이다. 한겨울 운동장에 만들어진 눈사람 마을의 시작도 꼬맹이 손으로 눈을 모아 뭉친 공이었고, 풀도 나무도, 개와 고양이도, 나와 이 우주도 모두 점에서 시작했다는 것. 현대 물리학자들은 그동안 더 이상 쪼갤 수 없다고 알려져 있던 원자의 핵조차 쪼개었으니 과연 그 점의 시작은 어디인지 신비롭기만 하다.
함께 모여(con-) 서로를 당기고(ten-) 있는 이미지가 있는 콘텐츠도 어원적으로 보면 내부에 있는 덩어리이기에, 이 또한 어떤 작은 점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이 콘텐츠가 웹툰, 애니메이션, 실사영화, 광고 등 무한의 영역으로 확대되고, 이를 다루는 제작사, 투자사, 유통사들이 복잡한 거미줄같이 얽혀져 어지러운 돈의 길을 만들어내었으니, 운동장에 만든 소박한 마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 어마어마한 세계는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예전에 심리학을 전공한 어떤 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 아이들은 왜 동화책을 읽어주면 귀를 쫑긋하고 눈이 반짝반짝해질까? 아이들은 왜 밤늦도록 잠 안 자고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할까? 선생님에 따르면, 이른바 진화심리학에서는 원시 시대부터 축적된 생존 비법을 단순하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담은 이야기가 바로 동화라고 본다고 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로 유명한 오누이의 이야기도 그 옛날, 호랑이가 많던 시절, 야생동물의 무서움을 알려주기 위해 생겨나고 구전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런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인지구조가 발달한다고 했다. 흥미로운 해석이다.
하긴, 책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 영화를 본 사람에게 너나 할 것 없이 “재밌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우리 마음속 깊은 어느 곳에는 재밌는 이야기를 쫓는 본능이 있는 듯하다. 진화심리학의 이론을 빌리자면, 재미있는 이야기는 내 생존에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고, 재미없는 이야기는 내 생존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리라.
결국 콘텐츠도 이야기라는 실체가 없다면 성장은커녕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야기란 무엇일까? 이야기라는 뜻의 영어 단어 스토리(story)는 역사라는 단어 history에서 생겼다. history는 고대어 ‘wied-’에서 나왔다. 이 말은 고대어에서 ‘본다’는 뜻이었는데 오늘날 view(보다), vision(시야)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보는 것은 곧 안다는 뜻이기에 현명하다는 뜻의 wise, 지혜와 재치를 뜻하는 wit도 여기에서 나왔다. ‘wied-’는 ‘wid-tor’로 변형되었고, 오랜 시간을 통해 histor(그리스어)와 historia(라틴어)를 거쳐 영어에서 history로 안착했다. 그리고 이 말을 줄여 사람들은 그냥 story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스토리에는 오랜 역사 속에서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지혜가 담겨 있다. 누구나 재밌는 이야기라면 몰래라도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걸 보면, 사람은 누구나 알고 싶은 마음, 지식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나 보다.
오늘날 복잡한 디지털 콘텐츠 세계에서 어쩌면 스토리는 절대반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반지를 쟁취하는 자만이 디지털미디어 자본을 송두리째 손에 넣을 수 있기에,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등 굴지의 OTT 회사들은 지금도 사투를 벌이며 세계 곳곳을 뒤지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런데 이 반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것을 찾으려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까? 그들은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영화 『반지의 제왕』은 절대반지를 손에 넣으려는 욕망의 사투를 그려내고 있다. 그런데 정작 반지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 프로도는 이 반지를 파괴하는 것이 모두를 구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되고, 반지를 사우론 화산의 용암 속에 던져버린다. 결국 절대반지는 누구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용암 속에 녹아 어디론가 퍼져 나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오늘날 디지털 콘텐츠의 절대반지인 스토리는 누구에게 있을까? 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 누구도 독점할 수 없도록 누군가가 이미 인류 74억 명의 머릿속에 골고루 분산시켜 놓았다. 참으로 다행스럽고, 참으로 신비로운 우주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