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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Aug 13. 2024

스토리는 어디에?

워드에세이: story

   눈이 오면 온통 하얀색으로 덮인 운동장을 도화지 삼아친구들과 눈을 뭉쳐 굴리며 그림을 그렸다눈 한 뭉치를 주먹에 쥐고 꼭꼭 누른 다음눈 위에 굴리기 시작하면 눈덩이가 점점 커지고친구들은 누가 먼저 더 크게 눈을 뭉치는지 경쟁하며 운동장 여기저기 뛰어다녔다가장 큰 눈덩이가 정해지면 그다음으로 큰 것을 옮겨다가 함께 들어 올려놓았다그리고 그다음 큰 눈덩이또 그다음 눈덩이…그렇게 우리는 눈사람 가족을 이곳저곳에 만들었다하얀색 운동장은 이렇게 여기저기 길이 났고길모퉁이에는 눈사람 가족이 생겨났다그 작품이 너무나 소중했기에우리는 추운 날씨가 이어지기를 바라며다음 날 아침 약속이나 한 듯 운동장에 다시 모였다.     


   자연이 만든 모든 것은 작은 점에서 시작한다는 걸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우주 만물의 원리를 배운다는 고등학교 물리 시간에도 세상의 원리는 둘째치고 복잡해 보이는 계산식에 진저리를 낸 것이 다였다그러던 내가 우리 집 어린 꼬마에게 처음으로 눈사람 만들기를 가르쳐 주면서 그걸 깨달았던 것이다한겨울 운동장에 만들어진 눈사람 마을의 시작도 꼬맹이 손으로 눈을 모아 뭉친 공이었고풀도 나무도개와 고양이도나와 이 우주도 모두 점에서 시작했다는 것현대 물리학자들은 그동안 더 이상 쪼갤 수 없다고 알려져 있던 원자의 핵조차 쪼개었으니 과연 그 점의 시작은 어디인지 신비롭기만 하다.     


   함께 모여(con-) 서로를 당기고(ten-) 있는 이미지가 있는 콘텐츠도 어원적으로 보면 내부에 있는 덩어리이기에이 또한 어떤 작은 점에서 시작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더군다나 이 콘텐츠가 웹툰애니메이션실사영화광고 등 무한의 영역으로 확대되고이를 다루는 제작사투자사유통사들이 복잡한 거미줄같이 얽혀져 어지러운 돈의 길을 만들어내었으니운동장에 만든 소박한 마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 어마어마한 세계는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일까.     


   예전에 심리학을 전공한 어떤 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아이들은 왜 동화책을 읽어주면 귀를 쫑긋하고 눈이 반짝반짝해질까아이들은 왜 밤늦도록 잠 안 자고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할까선생님에 따르면이른바 진화심리학에서는 원시 시대부터 축적된 생존 비법을 단순하고 압축적인 방식으로 담은 이야기가 바로 동화라고 본다고 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로 유명한 오누이의 이야기도 그 옛날호랑이가 많던 시절야생동물의 무서움을 알려주기 위해 생겨나고 구전되었다는 것이다그리고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그런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인지구조가 발달한다고 했다흥미로운 해석이다.     


   하긴책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영화를 본 사람에게 너나 할 것 없이 재밌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우리 마음속 깊은 어느 곳에는 재밌는 이야기를 쫓는 본능이 있는 듯하다진화심리학의 이론을 빌리자면재미있는 이야기는 내 생존에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이고재미없는 이야기는 내 생존과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리라.     


   결국 콘텐츠도 이야기라는 실체가 없다면 성장은커녕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이야기란 무엇일까이야기라는 뜻의 영어 단어 스토리(story)는 역사라는 단어 history에서 생겼다. history는 고대어 ‘wied-’에서 나왔다이 말은 고대어에서 본다는 뜻이었는데 오늘날 view(보다), vision(시야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보는 것은 곧 안다는 뜻이기에 현명하다는 뜻의 wise, 지혜와 재치를 뜻하는 wit도 여기에서 나왔다. ‘wied-’는 ‘wid-tor’로 변형되었고오랜 시간을 통해 histor(그리스어)와 historia(라틴어)를 거쳐 영어에서 history로 안착했다그리고 이 말을 줄여 사람들은 그냥 story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그러니 스토리에는 오랜 역사 속에서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지혜가 담겨 있다누구나 재밌는 이야기라면 몰래라도 들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걸 보면사람은 누구나 알고 싶은 마음지식을 얻고 싶은 마음이 있나 보다.     


   오늘날 복잡한 디지털 콘텐츠 세계에서 어쩌면 스토리는 절대반지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이 반지를 쟁취하는 자만이 디지털미디어 자본을 송두리째 손에 넣을 수 있기에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등 굴지의 OTT 회사들은 지금도 사투를 벌이며 세계 곳곳을 뒤지고 있는 듯 보인다그런데 이 반지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이것을 찾으려면 어디로어떻게 가야 할까그들은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영화 『반지의 제왕』은 절대반지를 손에 넣으려는 욕망의 사투를 그려내고 있다그런데 정작 반지를 가지고 있는 주인공 프로도는 이 반지를 파괴하는 것이 모두를 구하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되고반지를 사우론 화산의 용암 속에 던져버린다결국 절대반지는 누구도 독점할 수 없게 되었다아마도 용암 속에 녹아 어디론가 퍼져 나가지 않았을까그렇다면 오늘날 디지털 콘텐츠의 절대반지인 스토리는 누구에게 있을까깊이 생각할 것도 없다누구도 독점할 수 없도록 누군가가 이미 인류 74억 명의 머릿속에 골고루 분산시켜 놓았다참으로 다행스럽고참으로 신비로운 우주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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