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에세이: content, mass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딸아이가 오더니 책을 들이밀었다. 갑작스러워서 놀랐는데 책 제목을 보고 더 놀랐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너, 이런 거 좋아해?”
나의 첫 반응은 이랬다.
“아빠, 이게 요즘 유행하는 소설이야.”
“이게 소설이야? 좀비들 막 나오고 그런 거야?”
“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하하하. 그게 아니고, 췌장암에 걸린 여자 주인공이 한 말이야. 옛날에는 아픈 곳이 있으면 동물의 똑같은 부분을 먹었데.”
아이의 말을 들어 보니 작가의 전략이 제대로 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아마도 제목을 붙이면서 이런 식의 가족 풍경을 상상했을 것이다. 다소 괴기스러운 제목의 이 책은 일본 작가 스미노 요루가 쓴 청소년 성장기 소설이다. 2016년, 일본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2017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출간되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원작 소설은 이미 만화책으로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는 영화로도 나와 있었다. 언론에서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마음 따뜻하게 해 줄”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기사를 내보내고, 그 밑에는 “관심을 끌려고 별짓 다 한다”라는 비난과 “제목만 보고 평가하지 말라”는 댓글이 대조를 이루었다. 블로그마다 스포일러가 있다는 경고문을 시작으로 이런저런 평들도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인기 덕분인지 다음 해에는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되었다.
소설에서 만화로, 영화로, 또 애니메이션으로…. 제목도 제목이지만, 소설 속 이야기 하나가 어떻게 이렇게 빠르게 얼굴을 바꿔가며 세상에 나오고 소비되는지 그제야 실감이 났다. 당시 중학생이었던 우리 집 딸과 그의 친구들은 어차피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새로운 형태의 매체가 나올 때마다 찾아다니며 소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디지털 콘텐츠의 힘이다. 훌륭한 콘텐츠 하나만 있으면 디지털은 마법을 부리듯 이를 변신시키며 삶의 구석구석을 파고든다. 소설책만 읽으면 됐지 같은 얘기를 영화로까지 보냐고 말한다면, 기피인물이 되기 십상인 시대이다.
1907년 최초로 플라스틱이 탄생하고 20세기 내내 플라스틱이 종횡무진 우리 삶에 깊은 뿌리를 내렸다면, 디지털은 이를 능가하는 힘으로 21세기 인류를 지배하는 듯하다. 하지만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다고 해도 원유가 없으면 플라스틱이 그 생명을 이어가지 못하듯, 디지털은 소위 콘텐츠가 없다면 맥을 못 출 것이다. 재료가 없으면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언제부터인가 영어가 아닌 우리말에서 “콘텐츠”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솔직히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우리말로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말이 있는데, 굳이 저렇게 외국어를 가져다 쓰는 건 뭔가 특별나고 전문가스러운 느낌을 주려는 의도가 아닐까 하는 삐딱한 시선이 앞서서였다. 더욱이 이 단어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온 대로 “유무선 전기 통신망에서 사용하기 위하여 문자․부호․음성․음향․이미지․영상 등을 디지털 방식으로 제작해 처리․유통하는 각종 정보 또는 그 내용물”이라는 뜻이라면, ‘콘텐츠’가 아니라 ‘콘텐트’가 맞다. 영어 단어 content는 셀 수 있는 명사와 셀 수 없는 명사를 명확히 구분하여 서로 다른 뜻으로 쓴다. 셀 수 있는 명사의 복수형인 콘텐츠(contents)는 가방이나 그릇 등 뭔가를 담을 수 있는 것 안에 들어 있는 실질적 내용물을 뜻한다. 책의 경우에는 목차를 뜻하기도 한다. 반면에 셀 수 없는 명사로 쓰이는 콘텐트(content)는 책이나 강연에서 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를 뜻하거나, 디지털 미디어 안에 담긴 정보나 내용을 뜻한다. 그러므로 온라인 콘텐츠(online contents)가 아니라 온라인 콘텐트(online content)가 맞다. 아무튼 어떤 경로로 이 잘못된 말이 우리말에 들어와 버젓이 사전에 자리를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들어왔으니 어쩌나. 우리말로는 콘텐츠, 영어로는 content로 하는 걸로 정리해두자.
content는 ‘함께 모인다’라는 뜻의 ‘con-’과 ‘잡아당긴다’라는 뜻의 ‘ten-’이 합쳐진 말이다. ‘ten-’이 쓰인 단어는 상당히 많다.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attend(주의를 기울이다), intend(의도하다), extend(확장하다) 등이 있다. 어원적으로 보면 attend는 좋아하는 쪽으로, intend는 안쪽으로, extend는 바깥쪽으로 끌어당긴다는 뜻이다. content는 같이 뭉쳐서 서로를 당기고 있는 덩어리의 모습을 상상하면 되겠다. 안에서 붙잡고 있으니 어느 하나도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한다. 상자 속에 갇혀서 나오지 못하고 있는 덩어리가 곧 내용물이다.
뭉쳐진 덩어리를 뜻하는 말로는 mass도 있다. 우리가 ‘매스 미디어’라고 부르면서 이미 친숙해진 말이다. mass는 고대어 ‘mag-’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반죽하여 어떤 걸 만든다는 뜻이다. 덩어리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콘텐츠와 비슷하다. 덩어리란 다른 형태로 만들어지길 기다리는 재료이다. 사람들은 길가에 있는 흙덩어리, 돌덩어리를 가만 놔두지 않는다. 깨고 주물러서 뭐라도 만들고 싶은 게 사람의 욕망인가 보다. 그러니 콘텐츠란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또 다른 형태로 변형되기를 늘 기다리고 있으니 콘텐츠가 디지털을 만난 건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디지털도 콘텐츠를 보면 가만 놔두지 않는다. 주무르고, 깨고, 뜯고, 붙여서 뭐라도 다른 걸 만들어 낸다. 소설, 웹툰,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캐릭터 상품, 광고, 그림책…. 형태는 무궁무진하다. 이제는 AI가 되어 자생력까지 갖추었다. 콘텐츠를 두고 이제는 인간의 욕망과 디지털의 욕망이 서로 경쟁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이 든다.
몇 년 전만 해도 저녁을 먹고 나면 소파에 앉아 으레 아들 이름을 불렀다.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TV를 켜는 사람이다. 그러니 리모컨이 안 보이면 리모컨보다 아들을 먼저 찾는 것이 빠르다. 아들은 보던 채널을 사수하려고 리모컨을 숨겨 두고 모른다며 잡아떼었다. 이렇게 되면 작은 소동이 벌어진다.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소파를 뒤지고, 아들은 과장된 목소리로 짜증을 내거나 딴짓을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눈에 띄는 변화가 생겼다. 내가 소파로 가면 눈치껏 리모컨을 찾아주는 친절함을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변화는 아빠를 생각하는 정성스러운 마음 때문이 아니다. 유튜브에게 감사라도 표해야겠다. 거실 한쪽에 있는 가족 공용 PC는 언제부터인가 아들이 독차지하고 있다. 아들은 이제 TV에 관심이 없다는 듯, 헤드폰을 쓰고 외부 세계를 차단한 채 열심히(?) 유튜브 세계를 여행하기 바쁘시다. 딸은 방에서 내일모레 영상제에 제출할 콘텐츠를 편집하느라 며칠째 밤샘 작업을 하고, 아내는 가을에 있을 그림책 공모전을 준비한다고 6인용 식탁에 온갖 도구를 펼쳐놓고 연습과 수정을 반복하고 있다. 이런 조용하고 평화로운 한 가정의 저녁 풍경이라니. 디지털 콘텐츠가 점령한 가정의 새로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