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드에세이: dust, smoke, vapor
어젯밤,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르는 순간 둔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컴퓨터와 10년 이상을 함께 지내다 보니 이제는 작은 변화도 느낄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컴퓨터는 켜지지 않고, 쿨링팬만 돌다가 멈추기를 반복하였다. 이번에도 범인은 먼지일 가능성이 크다. 지우개와 안경 닦는 수건을 준비하고 컴퓨터 케이스를 열었다. 메모리 카드를 슬롯에서 조심스럽게 뽑아서 연결 부위를 지우개로 문지른 다음 안경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 내었다. 이제 다시 카드를 슬롯에 꽂고 전원 버튼을 눌러본다. 소리가 경쾌하다. 모니터가 반응하며 켜지자 나의 미소가 반사되어 보였다. 마치 컴퓨터가 웃고 있는 듯했다.
사실 메모리 카드와 슬롯 사이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빡빡하다. 그런데 먼지는 고집스럽게 그 작은 틈으로 들어가 신호의 흐름을 방해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희한하고 놀라운 일이다. 물론 원자와 전자의 세계로 간다면 경이로운 사건이 수도 없이 많겠지만, 그 영역은 100억 광년 떨어진 우주의 어느 곳을 상상하듯이 그냥 생각 속에서 ‘그렇다고 하니 그렇겠지!’ 하는 정도의 느낌이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보이지도 않는 먼지 하나가 내 눈앞에 있는 컴퓨터를 아예 시작도 못 하게 막아버린다는 것, 이것은 마치 투명 인간이 나타나서 앞에 있는 밥상을 치워버렸다는 걸 믿으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거짓말 같다. 어찌 보면 보이지 않는 먼지의 위력을 눈앞에서 체험하는 두려운 경험이다.
처음으로 나에게 먼지라는 존재에 대해 각인시킨 사람은 부모님이 아니라 형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형과 방을 같이 썼다. 여러 가지 추억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는 먼지와 관련된 추억이 상당히 많다. 형은 먼지를 너무나도 싫어했다. 내가 이불로 장난이라도 치려고 하면 먼지가 난다며 한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놨다. 우리 집은 단독 주택이었는데 한겨울에는 찬바람이 술술 들어와서 문을 꼭꼭 닫아도 입김이 나는 집이었다. 이불 장난은 이해한다 쳐도 형은 시도 때도 없이 환기해야 한다며 창문을 열었다. 잠자기 전에는 꼭 10분씩 창문을 열었는데, 다른 것은 다 참을 수 있어도 이것만은 참 견디기 힘들었다. 이런 습관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어느 날 슬쩍 형수님께 물어봤더니 먼지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도대체 어린 시절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형은 그렇게 먼지를 싫어하게 되었을까? 내가 컴퓨터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보이지 않는 먼지의 위력을 그 나이에 경험했던 것일까?
먼지는 영어로 dust라고 한다. 이 말의 뿌리는 고대어 ‘dheu-’이다. 이 고대어는 유럽의 여러 언어에서 먼지(dust), 연기(smoke), 수증기(vapor)라는 뜻을 나타내는 단어의 어원이 된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옛날에는 하나의 단어 안에 먼지, 연기, 수증기라는 뜻이 모두 들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영어에서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예를 들어 향수라는 단어이다. 향수는 perfume이라고 하는데 앞에 있는 ‘per-’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한다’라는 뜻을 가진 접두사이고, 뒤에 있는 ‘-fume’이 바로 연기를 뜻한다. ‘-fume’의 어원이 dust의 어원과 같다. 그러니 향수(perfume)는 어원대로 해석하자면 ‘공간 전체, 즉 공간의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면서 퍼지는 연기’를 뜻한다.
먼지와 연기, 그리고 수증기가 한 단어에서 유래했다면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듯이, 이 모두가 공기 중에 떠다닌다. 그러면 차이점은 무엇일까? 이들을 구성하는 물질의 종류가 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먼지의 주된 성분은 흙이다. 요즘은 먼지의 종류가 많지만, 고대에서 먼지는 주로 흙먼지를 의미했다. 연기는 불에 탈 수 있는 물질에서 생기고, 수증기는 물에서 생긴다. 흙, 불, 물, 그리고 공기. 어디서 많이 들어봤다. 바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물질을 이루는 기본 성분이라고 믿었던 것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공기 중에 떠다닐 수 있는 저 정도의 작은 입자라면 세상의 모든 물질을 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순전히 나의 상상이지만, 꽤 그럴듯한 논리가 아닐까?
먼지가 곧 흙이라고 생각하니 조금씩 의문이 풀리기 시작한다. 같은 부모 밑에서 자라고, 같은 집에서 컸어도 형과 나는 다른 점이 많다. 그중 하나를 꼽자면, 나는 식물 기르기를 좋아하고, 형은 싫어한다. 우리 집 거실 한 면에는 각종 화분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기르기 쉬운 고무나무부터, 잎이 넓게 퍼지는 아레카야자, 겨울마다 어김없이 꽃을 피우는 게발선인장도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받아온 이름 모를 식물도 6년째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5년 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포인세티아도 보금자리에서 건강하게 크고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정원을 가꾸셨기에 나도 그런 취미가 생겼나 보다. 그런데 형네 집에 가면 화분이 하나도 없다. 언젠가 형이 한 말이 이제야 생각난다.
“나는 이상하게 화분이 싫어. 나도 왜 그런지 생각해 봤거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릴 때 아버지가 정원을 가꾸셨는데, 주말마다 나를 불러서 일을 시키신 거야. 돌 굴리고, 흙 푸고, 모래 나르고, 여기에 있던 걸 저기로 옮겨 심고, 잔디 깎고.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
아, 세상에! 그러고 보니 아버지는 나에게 흙을 나르라고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형은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싫다는 내색 한 번 안 하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왜 나만 시키냐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야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 나이가 들어서야 깨닫다니. 먼지. 흙으로 이루어진 것! 그래서 형은 먼지를 그토록 싫어하게 된 것일까? 얼마나 싫었으면 한겨울 추위에도 창문을 열었을까.
먼지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몇 년 전에 유명한 피아니스트의 공연을 본 기억이 떠오른다. 콘서트였지만 중간중간 곡에 얽힌 이야기도 해주었고, 관객과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운 좋게도 나는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이분이 어떤 곡 하나를 연주하고서 일면식도 없는 나를 보면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제가 맨 앞줄에 앉아계신 저 남자분을 보았는데요, 너무나 편안하게 제 곡을 감상해 주셔서 그런지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우리 집 앞에 아파트 공사를 하고 있거든요. 창문을 열어 놓으면 공사장 먼지가 집으로 엄청나게 들어와요. 어느 날 제가 앉아있는데, 피아노 옆 구석에서 먼지가 동그랗게 뭉쳐져서 귀엽게 굴러다니는 거 있죠. 그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너무 편안해지는 거예요.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결에 부드럽게 굴러가는 먼지 공이요. 상상이 가시나요? 제가 그걸 보고 그 자리에서 단숨에 이 곡을 작곡했어요. 그런데 곡을 연주하고 저 앞자리에 계신 분을 보니 정말 편안해 보이셨어요. 마치 제가 그 먼지 공을 바라볼 때처럼 말이죠.”
관객들은 재미있다며 웃음과 박수로 호응했다. 피아니스트의 말을 듣고 나니 영화 『이웃집 토토로』에 나오는 먼지 요정이 생각났다. 시골로 이사 온 남매가 시골집을 구경하다가 만난 시커먼 먼지 요정들! 남매가 먼지 요정들과 한바탕 재미있게 놀고 손발이 시커멓게 된 장면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일본의 뇌과학자 요로 다케시는 “생물의 근본에는 모름지기 리듬이 있다.”라고 말했는데, 무생물인 먼지에도 생명력을 부여하면 리듬이 생기나 보다. 넓은 곳도 많으련만 기어코 좁은 틈새로 기어들어 컴퓨터를 고장 내고, 싫다는 사람에게는 매일 찾아와 괴롭히고, 음악가 앞에서는 부드러운 선율의 음악을 선물하며, 아이들 앞에서는 동동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