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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림 Feb 21. 2024

동물은 기호가 아니다

흙과 나무로 빚는 에세이

   북한산 족두리봉을 시작으로 능선을 따라가는 등산로는 북한산 절경이 한눈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길이다. 특히 가을 단풍이 드는 계절에 이곳을 걷다 보면 풍경에 한눈이 팔려 다리가 아픈지도 모르고, 어디쯤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지금 기억에는 비봉과 사모바위 사이쯤 되었던 것 같다. 잠시 싸 온 간식을 먹으려고 앉으려니 한 아저씨가 순하게 생긴 하얀색 개 두 마리를 옆에 두고 음식을 먹이고 계셨다. 국립공원에는 반려견을 동반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한참 나중에 들었고, 어떻게 이 험한 산에 개가 따라왔을까 궁금해져서 말을 건넸다.


개가 정말 대단하네요. 이 험한 산을 따라오다니.”

아니에요. 이 개들은 여기 사는 떠돌이 개예요.”


   너무 놀랐다. 저렇게 순해 보이는 개가 떠돌이 개라니. 아저씨 말에 따르면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이곳에 올라오는데, 저 개들이 자꾸 따라오길래 응해줬더니 요즘에는 친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을 해주셨다.


요놈들이 암컷하고 수컷인데, 저기 밑에 조금 내려가면 바위 밑으로 얘네들 집이 있어요. 얼마 전 새끼를 몇 마리 낳았는데, 잘 있는지 모르겠네. 키우던 개를 가방에 담아와서 여기다 버리고 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세상에…. 생각지도 못 한 말씀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했다. 한참 동안 멍하니 개를 바라보았다. 순하고 착해 보이던 흰둥이들이 갑자기 처량하고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입 속을 맴돌았다. 계속 보고 있자니 안 좋은 마음이 들어 개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디즈니가 『101마리 달마시안』의 성공에 힘입어 그 속편인 『102 달마시안』을 만들 때가 생각난다. 미국의 동물 애호가들이 속편을 제작 중인 디즈니에 대규모로 항의를 한 사건이 있었다. 이유는 이렇다. 영화 속에 나타난 달마시안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온순해서 사람들은 이 개가 다루기 쉽게 생각했나 보다. 영화가 개봉된 1996년 직후, 반려견 인기 순위 20위 밖에 머물던 이 개가 10위 안으로 들어왔다. 사실 달마시안은 고집이 세기로 유명한 다혈질 종이라고 한다. 영화 개봉 이후, 달마시안을 샀던 사람들은 개의 본성을 겪고 나서 개를 버리기 시작했다. 통계에 의하면 버려지는 달마시안의 수는 반려견 인기 순위와 비례하여 100%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물론 디즈니가 그런 의도로 영화를 제작하지는 않았겠지만, 동물 애호가들이 영화를 탓한 것은 당연했다. 디즈니도 도덕적인 책임을 느꼈던지 『102 달마시안』의 개봉에 즈음해서 ‘반려동물 제대로 기르기에 대한 홍보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두 번째 작품은 흥행에 실패했고, 그 이후 후속작은 나오지 않았다.


   동물은 사람의 편의를 위해 이 세상에 생겨난 것일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요즘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동물은 인간의 소유물이라든지, 어제 키우고 싶어서 데려왔다가 오늘 귀찮아서 쫓아낼 수 있는 존재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마 없을 것이다. 아니 없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얼마 전 나온 뉴스는 이런 믿음을 흔든다. 관악산과 북한산 일대에 버려진 유기견이 200마리 이상 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동물을 사람의 시선으로 해석하고 이용하는 것은 오늘날만의 얘기는 아니다. 동물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믿었던 시대가 있다. 이른바 종교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중세 유럽이다. 중세 유럽 사람들은 자연이란 인간을 위해 신이 만든 교과서라고 믿었다. 다시 말해 모든 동물은 인간에게 성경의 가르침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중세 시대에 쓰인 『베스티어리』(The Bestiary)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다양한 버전을 통해 중세 시대 당시 유럽 전역에 유행처럼 퍼졌다. 이 책은 이 세상에 있는 동물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그림과 함께 설명해 놓은 책이다. 라틴어로 쓰였기 때문에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 그림이 곁들어져 있다. 책에는 우리가 가까이 볼 수 있는 동물부터 이상하게 생긴 상상의 동물까지 다양한테, 요즘 아이들에게 인기 있는 포켓몬스터의 캐릭터들이 연상될 정도이다.


   『베스티어리』에 실린 동물의 예를 들어볼까? 태양을 바라보며 날아가는 독수리는 인간이 신에게로 귀의해야 한다는 텍스트였다. 빛은 곧 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미 독수리는 태양을 응시하지 못하는 어린 독수리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서 빛을 멀리하는, 곧 신을 멀리하는 인간은 죄인이라고 가르쳤다. 대표적인 상상의 동물인 용(dragon)은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용과는 완전히 다르다. 서양에서는 성경의 영향으로 뱀을 사악한 동물로 여기는데, 『베스티어리』에서는 용을 가장 악한 뱀의 한 종류라고 가르친다. 용은 천국으로 가는 길에 숨어있다가 똬리를 틀어서 사람들을 질식시킨다는 것이다. 부엉이는 빛보다 어둠을 좋아하는 더러운 새라고 가르쳤다. 빛은 곧 신이고, 어둠은 죄였기에 부엉이는 죄를 상징하는 혐오의 동물이 되었다.


   그럼 개는 어떻게 설명해 놓았을까? 개는 혀로 핥아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한다고 설명하면서 혀는 곧 고해이고, 고해성사를 하면 죄가 없어진다는 의미라고 가르쳤다. 고기를 물고 강을 건너던 개가 물에 비친 고기를 보고 자기 것보다 더 큰 고기를 먹고 싶어서 물고 있던 것을 떨어뜨린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욕망의 허상을 경고하는 이야기이지만, 중세 유럽에서 개는 이처럼 어리석음의 상징이었다. 그 이외에도 사슴은 서로 도와주는 협동을, 고래는 인간의 사악한 본성을, 개미는 고통스러운 심판의 날을 대비하여 미리 선행을 쌓아야 한다는 인간의 의무를 상징했다.


   그 오랜 시절부터 인간은 자신들의 시각에서 동물을 해석했고, 지금도 재해석하고 있다. 그런 인간에게 동물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니다. 인간에 의해 해석되는 기호, 말이 없는 기호이다. 반항하지 못하는 기호이며, 교육을 위한 도구로서의 기호며, 언제든 인간의 필요에 의해 재해석되는 기호이다. 오늘날 개미는 선행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기호가 아니라 집안의 해충이라는 기호가 되어 살충제의 포화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개미도, 그리고 그 어떤 동물도 인간의 입맛에 맞게 해석되는 기호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제의 필요에 의해 키우던 개가 오늘의 귀찮음으로 인해 버려지는 기호에 불과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개가 우리를 해석하지 않듯, 우리에게도 그들을 해석할 권리가 없다.


   이른바 인류세(人類世)라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인간이 지구 환경을 바꾸는, 지구 역사상 초유의 지질 시대이다. 지구 위에 인류와 인류가 키우는 가축이 전체 동물의 9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야생 동물은 단 3퍼센트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동물에게 무슨 짓을 해왔던 것일까? 이제는 이용이 아니라 공존이다. 더 이상 동물은 해석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물은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인간 집단을 넘어, 지구 위 모든 생명체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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