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시인의 <눈밭에 새소리>
지난해 가을 출간한 김영삼 시인의 시집[우연은 필연처럼 오지], 달아실 시선 83번째 시집으로 시인에겐 두 번째 시집이다. 김영삼 시인은 나와 같은 동향이며 나이도 나보다 한 살 많으신 분이다. 그동안 시인의 시집을 다시 펼쳐 보던 중 특히 깊은 인상을 받은 <눈밭에 새소리>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시는 시각과 청각을 동시에 자극하는 이미지를 통해, 시적 자아의 내면적 감응과 자연의 섬세한 움직임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누가, 크나큰 백지의 적막 앞에서 붓을 꺾고
갈기갈기 찢어 흩뿌리고 있나
한지 조각이
고요의 조각들이
고요하게도
논바닥에 쌓인다
다시금 한 장의 적막이 넓게 펼쳐진다
짹짹짹짹짹...
까막눈 참새가 멋모르고
붓 대신 소리로 획을 친다
울음이 짙은 먹물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김영삼 시인의 <눈밭에 새소리> 전문
시의 도입부는 마치 한 폭의 수묵화처럼 펼쳐진 겨울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크나큰 백지의 적막’은 눈 덮인 풍경을 종이(백지)에 비유하면서, 자연을 거대한 시적 공간으로 형상화하고 있으며, 동시에 이는 시인이 직면한 내면의 고요함, 혹은 창작의 막막함으로 읽을 수 있다. 백지는 시인이 예술적 침묵을 상징하며, 적막은 그 침묵의 깊이를 드러낸다. 시인은 이러한 정적 속에서 무언가를 써내야만 하는 창작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다.
이러한 정적의 공간에 등장하는 것이 바로 '새소리'다. 눈 위를 가르며 날아든 새가 “붓을 꺾고 갈기갈기 찢어 흩뿌리고” 있다는 묘사는 새의 울음소리와 날갯짓을 시각적 형상으로 바꾸어 놓는다. 붓은 인간의 예술적 그림이나 글의 도구이지만 이 시에서는 자연의 ‘새소리’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는 곧 시 자체가 시각화된 음악이며, 청각화된 그림이라는 새로운 미학적 관점을 제시한다.
‘한지 조각’, ‘고요의 조각들’이라는 표현은 고요함을 실체화함으로써, 감각적 전이, -즉 공감각적 표현-를 더욱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특히 “짹짹짹짹…”이라는 의성어는 고요하게 유지되든 정적 분위기에 생동하는 리듬을 불어 넣는다. 시 전체는 짧은 행과 동사 중심의 간결한 구문으로 구성되어, 장면 전환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며 시의 리듬을 경쾌하게 유지하고 있다.
“붓 대신 소리로 획을 긋는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도구인 붓이 아닌 자연의 소리(새소리)로 시를 ‘쓰는’ 행위이다. 이는 눈밭이라는 비어 있는 공간 위에 단순히 ‘소리’라는 존재감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시인의 존재론적 고백으로 읽을 수 있다. 인간의 도구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은 예술의 한계 앞에서, 시인은 자연의 감각, 존재의 울림을 빌려 시를 쓰려는 의도로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자연에서 들리는 가장 작은 소리, 가장 미묘한 빛의 변화조차 언어로, 형상으로 포착해 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이는 시인이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자신을 비우고 존재의 진실에 다가서려는 시인의 의식적 행위로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감각적 예민함은 단순한 자연 묘사를 넘어서 존재에 대한 직관적 감지로 나아간다. 이는 시인이 예술의 한계를 초월하기 위해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의식적 시도라 볼 수 있다.
“울음이 짙은 먹물처럼 반짝반짝 빛난다”라는 구절은 시 전체의 감각을 집약한 구절로서 감정(울음)은 자연(먹물)으로, 다시 그것은 표현(빛)으로 전환되어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며 시 전체를 빛나게 하는 공감각적 수묵화를 그리고 있다. 시인이 자신을 비우고 자연 속으로 스며들며 자연과 하나 되어 존재 자체를 노래하려는 자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시적 합일의 순간은 마치 자아를 내려놓고 도달하는 해탈의 경지와도 같다. 합일을 통해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영혼의 몸부림으로도 읽힐 수 있다. 그 합일의 순간은 바로, 인간의 언어가 도달하지 못하는 침묵 속에서 자연의 소리로 대신 써 내려가는 ‘눈 위의 획’이라 할 수 있다. <눈밭에 새소리>는 자연의 한 장면을 매우 세심하게 포착하면서, 내면의 감응과 연결하여 언어화한 아름다운 시다. 정적과 동적 이미지, 시각과 청각의 대비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시인의 섬세한 감수성과 깊은 통찰을 읽을 수 있다. 2025.4.19./김승하 시인/kimseon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