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적 언보싱(Conscious unbossing)
요즘 자주 듣는 이야기 중 하나가 "진급하기 싫어요"입니다. 직장 내 승진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권한과 책임을 지는 승진보다는, 개인의 워라밸과 자기 성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젊은 세대에서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저희 회사도 시대의 조류를 잘 따라가고 있는지(?) 심심치 않게 들리곤 하네요.
저는 올해로 33년 차 직장인이고 기업의 꽃이라는 '찐' 임원까지는 못 달았지만, 사원 중 최고직급인 부장으로 임원급 실장까지 경험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팀장이나 실장이라는 자리가 갖는 부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긴급하고 부담스러운 요구사항,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불만들, 관련부문과의 업무 협업 등 온갖 처리해야 할 다양한 일들이 팀장과 실장의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주어지는 보상은 미미하거나 눈에 띄게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업무량은 배로 증가되고 주어지는 책임은 엄청 크게 느껴집니다. 제 주위에는 팀장이 사사건건 대들고 음해하는 일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결국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 실장도 있습니다. 내려오고 나니 마음도 홀가분하고 이제야 살 수 있겠다고 느껴졌다고 하네요.
베이비붐 세대
60년대 생은 대학진학률이 30% 정도로 낮았기 때문에, 대학 졸업자가 기업에 입사하기는 지금에 비해 상대적으로 쉬운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대기업은 여전히 입사하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기' 만큼 어려웠던 기억이 나지만, 지금보다는 그래도 한결 쉬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대기업은 거의 그룹공채를 통해 신입사원을 모집하였는데 보통 1,000명 단위로 뽑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입사동기가 엄청 많았고, 이로 인해 동기간 경쟁도 치열하였습니다. 저 역시 차장 진급 때 1번, 그리고 부장 진급 때 2번의 진급 누락이 있었습니다. 특히 진급에 누락된 선배가 많은 부서는 이른바 '연공서열'이라는 나름(?)의 규칙 때문에 능력여하를 떠나서, 선배들이 모두 진급할 때까지 진급이 늦어지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물론 재목이 안 되는 선배는 차치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진급이 누락된 해에는 일도 태만하게 하고 까칠한 언행을 해도, 다들 눈감아 주는 분위기였습니다. 뭐 그러다가 한 2~3개월이 지나면 다시 열심히 일해서 다음 진급을 노려야 했습니다.
여하튼 예전에는 회사와 직원들 사이에서 성과와 능력을 인정받으면 승진하는 게 당연하고, 승진을 하면 성공했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요즘은 '가늘고 길게, 편하고 안정적으로' 정년까지 다니자는 생각이 대세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어느덧
팀장이 되고 실장이 되어서 보니 이제는 진급을 안 해도 좋고, 심지어는 진급을 거부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일도 열심히 하고 다른 직원과도 관계가 좋은 직원인데 진급은 안 하겠다고 합니다. 여러 번 면담을 통해 이유도 물어보고, 진급하면 좋아지는 부분(?)도 설명해 주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진급을 거부하는 이유는 대부분 "업무 부담을 지고 싶지 않아서", "누구처럼 진급한 후 윗사람에게 시달리기 싫어서", "퇴근시간이 늦어지기 싫어서", "워라벨을 놓치기 싫어서", "아내 대신 애를 돌봐야 하기 때문에", "노조에서 강제 탈퇴 당하기기 싫어서(저희 회사는 관리자가 되면 노조에서 자동 탈퇴됩니다)", "직장생활을 길고 오래 하기 위해서" 등등 다양한 사유가 있더라고요.
어떤 부분은 이해가 되고 어떤 부분은 말도 안 되는 사유지만, 그래도 진급을 하면 받게 되는 금전적 이점이나 대외적 위치의 격상 등을 설명하였으나, 한번 돌아선 마음을 다시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진급이나 승진을 하지 않고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 최소한의 노력만으로 영혼 없이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것)'을 즐기는 직원이 많이 생긴 것 같습니다. 점점 팀장과 실장이 조직을 운영하는데 어려움은 가중될 수밖에 없어 보이네요.
예전 같으면 조직 내에서 가장 유능한 직원, 조직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직원들이 주로 팀장 진급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위치에 있는 직원들이 진급을 거부하고 팀장 자리를 싫다고 하면, 실장은 어쩔 수 없이 다른 팀에서 팀장급을 데려와야 합니다. 이럴 경우 기존 업무에 대한 이해의 부족, 과거부터의 업무 연속성 단절 등으로 인해 팀원들이 힘들어지게 됩니다. 물론 장점도 있기는 합니다. 업무를 잘 모르는 팀장이 올 경우 실무자가 쉽게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끌어갈 수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팀장이 깐깐할 경우 반대로 실무자가 상세한 설명을 통해 팀장을 이해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지요. 여하튼 같이 근무하였던 직원이 팀장으로 올라가는 것이 팀원들이나 팀장에게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요즘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신문이나 방송 등에서 "○○기업, 결국 인원감축 카드 꺼냈다... 권고사직 통보", "대규모 인원 감축... 피눈물 날 연말 구조조정"이라는 기사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기업은 경영의 어려움 때문에 임원들은 주 6일 근무를 하기로 했다", "어떤 기업은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임원의 수를 줄이고, 법인카드의 한도 등 복리후생 부분을 축소하였다"등과 같이 임원으로 승진하면 안 좋아지는 부분만을 부각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니 차라리 일찍 진급해서 임원까지 승진할 생각은 추호도 없고, 해고의 칼바람이 부는데 관리자가 되지 않고 강력한 노조 뒤에서 안전하게 숨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습니다.
임원을 달고 싶어 하는 직원들은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기 승진으로 인한 조기 은퇴가 공식화된다면,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임원으로의 진급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임원 대신 일반직원으로 워라밸을 즐기면서 정년까지 다니는 게 낫다는 분위기가 점점 고착화되는 것 같아 아쉽기는 합니다.
하지만 '조용한 퇴직'을 추구하는 직원이 늘어나는 현실을 타피 할 방안이 현재로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주위를 보면 '참 부당하고 자기 위주로 행동하고, 직원을 괴롭히는 못된 상사'가 보입니다. 이들로 인해 일할 의욕을 잃는 직원들도 볼 수 있습니다. 인사조직은 이런 인물이 상사가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철저한 검증을 해야 하고, 만약 검증에 실패하였다면 빠르게 솎아내야 합니다. 아직도 회사 내 '줄 서기 문화'가 있다면 이런 '불량 상사'가 없어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또한 충분하고 정당한 보상 없이, 업무량의 증가 및 책임감 부여가 이러한 현상을 더 부축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물론 원하는 만큼 다 주는 충분한 보상은 없습니다. 하지만 보상과 업무량이라는 시소가 중간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느껴지도록 세심한 배려가 필요합니다. 팀장이 되었다고 회사에서 휴가를 사용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본인의 연차를 사용하여 팀장휴가를 최소 1주일은 떠나라는 것이지요. 일종의 힐링휴가라고 하네요. 이런 게 보상이고 세심한 배려인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의 성공을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성취감을 느끼는 횟수가 나날이 늘어가고, 난도가 높은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역량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량은 남이 가로채거나,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온전히 자신만의 가치로 자리매김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보상도 받고 승진으로 이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생활이 될 것이고요.
오늘도 펭귄의 짧디 짧은 다리로 달리고 달리고 ~